12월 겨울 바람이 제법차가운 날에 세종시에서 두 번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2022.5월 지정은행나무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지번을 네비에 입력하고 갔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끊임없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세종시의 길들은 매번 자세히 확인하고 위치를 찾아야 한다. 어렵게 찾아 낸 입구는 맨 땅의 공사장을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은행나무 입구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먼지 묻은 현수막을 보니 그제야 울퉁 불퉁한 길을 지나 온 불편함을 잊을 수 있었다. 찾아오기 어려워서인지 은행나무 주변은 공사장의 소음을 모두 흡수한 듯 고요하였고 노란 이을 모두 털어내고 빈 가지만 남아 있는 은행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 임난수 장군(1342~1407)은 고려말 최영장군과 함께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1374년)을 평정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귀향길에 심기촌(금강변)이라 불리던 이 곳에 정착하였다. 임난수 장군은 탐라를 정벌하던 때 외적에게 잘린 손을 화살통에 메고 싸웠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다소 과장된 듯한 전설에는 후손들의 자긍심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던 이 곳에서 장군이 심었다는 나무는 600여년을 지키고 있고, 나무는심은 이의 성정을 담은 듯 하였다. 은행나무 뒤에는 임난수 장군을 제향하는 숭모각이 있다. 숭모각 사당에는 임난수 장군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은행나무오 승모각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전월산에는 고려왕조를 향해 절을 올렸다는 부왕봉과 상려암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임난수 장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내린 여러 차례의 벼슬을 마다하고 끝까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충절에 세종대왕은 '임씨 가묘'란 현판과 토지를 하사하였다. 세종대왕이 하사한 그 땅에 600여년이 지난 후 세종대왕의 이름을 이은 대한민국의 균형발전의 상징 도시가 생겨났다.
2012년 세종시가 출범하고 600여년을 뿌리 내리며 살던 부안 임씨들은 모두 이 곳을 떠났다. 이주의 그 과정을 알 수는 없으나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말없는 은행나무는 이 곳에 살던 이들의 이야기를 나이테에 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소리없는 음성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하고 있을꺼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든 생각에 강인하게 옆으로 뻗은 은행나무의 뿌리에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은행나무는 지난 600여년동안 그랬던 것처럼 매년 푸릇한 신선함으로 성장하며 노란 열매를 맺을 것이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어갈 것이다. 또한 은행나무와 함께 생활했던 양화리 주민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 줄 것이고 새롭게 발전하는 세종과 함께 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