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기록, 월담 / 세종시_역사

세종의 격전지

아카이브 담당자
게시일 2024.05.29  | 최종수정일 2025.10.15



세종의 격전지



외국인들이 한국에 방문하게 되면 휴전국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한 나라라고 말한다. 실제로 세계에서 안전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는 한국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휴전국가이자 분단국가이다. 6·25 전쟁, 다른 말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하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세종시 지역별 6·25 전쟁 현장의 모습은 어땠을까? 향토지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전쟁의 순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치원읍지(2012, p.218~219)를 보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친으로 발발한 전쟁에서 세종시, 당시 연기군에서는 1950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열흘 간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려가던 한국은, 7월 7일 미군(제24사단)이 대전에 도착하고, 조치원 북방으로 이동해서 지연전을 실시했지만, 곧 기세에 밀려 전의로 철수하게 되었다. 




 
개미고개
(출처 : 전동면지)


전동면지(2011, p.164-166)에서, 1950년 7월 8일 미군의 딘 소장은 "어떤 희생을 무릎쓰고라도 금강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모든 부대에 전달하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7월 10일 북한군은 새벽 안개를 이용해서 미군 방어선 깊숙히 침투했고, 7월 11일 개미고개에서는 전면전이 벌어졌다. 개미고개는 전의면과 전동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전동면지에서 '개미고개'는 미군의 마지노선이라고 언급한다. 당시 북한군은 대전 함락을 위해 진격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대전이 무너진다면 대구와 부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개미고개가 포함된 전동지역의 전투는 금강을 지키기 위한 전투로서 아주 중요했다. 

한국전쟁전투사 오산-대전전투(p.120~124/군사편찬연구소)를 살펴보면, 7월 11일 전투는 전의-조치원 전투라는 큰 틀에서 서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전투사는 시간 흐름에 따라 급변하는 전쟁의 현장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전의 전투
(한국전쟁전투사 오산-대전전투 p.121 발췌)




전동면지(p.166~167)에서는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미 제21연대는 12시간에 걸친 개미고개 전투에서 667명의 병력 중 무려 517명을 잃었다고 한다. 물론 7월 12일 새벽엔 2천명이 넘어선 북한군이 조치원에 들어서고 미 제21연대는 금강을 넘어 철수를 했지만, 북한군의 가장 강력한 2개 사단을 맞아 3일간이나 남진을 지연시켰다. 인명과 장비의 막대한 손실이 있었으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전투로 희생된 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현재 개미고개에는 위령비를 비롯하여 매년 추모제를 실시하고 있다. 

 
 
'자유평화의 빛' 위령비(왼쪽), 개미고개 조형물(오른쪽)
(출처 : 전동면지)



한국전쟁전투사 오산-대전전투(p.135~137)에서 미 제24단장 딘 소장은 이후, 금강선 방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북한군을 막기 위해 12일 밤과 13일 아침, 공주, 대평리, 신탄진 등 금강에 걸려 있는 4개의 교량을 폭파했다. 


 
폭파된 금남교



해당 사진은 1950년 7월 13일 촬영된 사진으로, 북한군의 금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미군은 금남교(당시 명칭 금성교)를 폭파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3일 뒤인 7월 16일 도하하였고, 이 다리는 이후 가교로 운영되다가 1958년 폭 7.7m로 복구하였다.


 
복원한 금남교
(출처 : 연기군 뿌리를 찾아서 Ⅰ)

 


그리고, 6·25 전쟁 중 조치원의 지명을 딴 조치원호가 있었다. 조치원호는 전쟁 당시 아군 수송선으로 활동했던 군함이다.


 
조치원호(LST-665)




조치원호(LST-665)는 미국이 건조, 1950년 7월 1일 교통부 대한해운공사로부터 해군이 인수하였고, 1952년 9월 3일 LST-805함(천보)로 명명된 후, 1957년 12월 31일에 퇴역하게 되었다.

해당 전함이 조치원호로 명명된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군함명들을 보면 안동, 충주, 제천 등 지역의 명칭을 딴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과 한·미 해군작전(p.240~243/상권)을 보면, 1950년 7월 21일, 북한군이 여수로 진격하려고 하자 아군 부대의 해상철수를 위해 해군본부가 LST 조치원호·안동호를 비롯한 8척의 수송함선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치원호에 정부 물자를 적재하고 작전 수행을 진행했다. 


 
조치원호 등 해상수송 실적
(출처 : 6·25전쟁과 한·미 해군작전(p.243 발췌/상
권)




또한, 조치원호는 장사동 상륙 작전(경북 영덕군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목적) 에서 큰 역할을 했다. 6·25전쟁과 한·미 해군작전(p.578~587/상권)을 보면,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LST 문산호가 해안가에 깊이 좌초되어, 아군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LST 조치원호를 현지에 급파했다고 한다. 조치원호는 670여명의 한국육군유격대원과 문산호 승조원들을 구출하여 9월 20일 부산항으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조치원호는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8회 출동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치원호 등 한국해군 수송함정의 출동횟수(1951.7.1.~1953.7.27.)
(출처 : 6·25전쟁과 한·미 해군작전(p.1181 발췌/하권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 한 때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고, 현재도 휴전상태이지만 6·25 전쟁에서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6월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