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면_문화

비룡소 가유? 옹기 사러 가는디~ 금남면 용담리 독(옹기) 이야기

이은주
게시일 2024.07.18  | 최종수정일 2026.08.03

[글 / 지역문화기록가 이은주]


비룡소 가유? 옹기 사야는디^^
금남면 용담리 독(옹기)이야기

 
 
 
기사님 이 버스 비룡소  가유?”
 
그류 가유





 

 
용담리 가마터를 돌아 보다.
 

그렇게 도착지를 확인한 후
반석에서 65번 버스를 타고 세종터미널행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을 때쯤 얼마되지 않아 오른쪽 2차선 도로로 핸들을 꺾으신다.
 
 
?!~  터미널  가는  버스가  맞나  싶어  다시  한번  노선도를  검색해보고는 안심을  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그렇게  시골  풍경에  눈을  돌리다  오른쪽으로  커브를  휙  도는  순간  용의  품에  쏘옥  안기다시피  한  아담한  동네가  나오는데  바로  비룡소’   충남  연기군  남면  용담리  산  1번지 (세종시 출범 이전 주소)  옹기  공장이  눈에  들어  왔었다.


행여나 지금까지 남아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혹시나 하고 둘레둘레 고개를 빼어 쳐다보지만 지금은 가마터도 없어지고 동양가설’  이라는 공장간판이 눈에 들어오기에 낯설음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현재의 가마터 모습
(촬영 : 2024.7월)




금남면은 금강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면이라하여 금남면이라 하였고, 계룡산의 정기가 강의 이남인 금남면  전역까지  미친다하여 마을 이름엔 계룡산의  ()자가 들어가는 마을이 많다.

용담리용포리황용리,~ 등등
 
 
지금은 세종시 개발로 인해 전원 주택이 들어섰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옹기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고 27호의 사택이 있었고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옹기 만드는 기술자만해도  20 여명, 뒤모도 (허드렛일  도와주는  사람만 해도 30 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용담리 마을 표지석
(촬영 : 24.7월 사진)



터주대감 용담리 이장님에게 옹기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20033월에 세워진 마을입구의 표지석을 보고 용의 품에 쏘옥 안긴 듯한 마을을 따라 올라가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을 만났는데 마침 용담리 이형석 이장님이셨다.

용담마을 이형석 이장님은 이 곳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자라셨고 학마을로 유명한 감성초등학교’ 13회 졸업생이시고 이 마을을 떠나보신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장님에게 용담리 옹기공장에 대한 역사를 들어 보았다.

 
 






 
용담리 이형석 이장님
                   





 
 
 이장님에게 용담리에 대해 듣다

리포터: 이장님 용담리 마을에 대해 알고 싶어서 돌아보고 있어요. 왜 용담이라고 하였을까요?
▶▶ 이장님: 아 첨부터 용담리는 아녔고 원래는 비룡소라고 했어, 옛날에 맹사성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하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비룡소라고 했는디 어느순간부터 주소에 봉께 용담리라고 되어 있더라구 일제 강점기에 그렇게 해 놓은거 같은디 그 때부터 용담리가 된거지 뭐.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은 용담리보다 비룡소라고 해야 더 잘알아 들어.


리포터 : 아 그렇군요. 기록에 보니 용담리에는 옹기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대해 아는게 있으실까요?
▶▶ 이장님: 아 아다마다 내가 거기서 총각때 5년간 일도 했는걸그때가 아마 내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었을거야. 그 때만 해도 사람이 바글바글 했지. 그 곳에 종사하는 사택수만 해도 27호나 되었으니께.
 
 
리포터 : 그러면 1980년대 초반이셨겟네요? 그 때부터 옹기를 굽기 시작했던가요?
▶▶ 이장님: 아녀 그건 아니고 내가 어렸을때부터 있었으니까 6.25전쟁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시작하지 않았나 싶어.


리포터 : 그럼 이장님은 거기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옹기 만드는 장인이셨나요?
▶▶ 이장님: : 장인은 무슨~ 난 옹기쟁이(옛날에는 기술자를 쟁이라고 낮춰부름)는 아니었고 그냥 옹기쟁이 따라다니며 흙 퍼오라면 흙 퍼오고,가마에 불 지피라 하면 지펴서 옹기를 구워내는 뒤모도(허드렛일을 도와 주는 사람) 였어.
 

리포터 :사택이 27호나 되었을 정도면 꽤나 큰 규모였는데 그걸 다 어떻게 파셨어요?
▶▶ 이장님: 이고 지고 나중에 차에 실고 전국 도매상이나 소매를 하고 다녔지아마 여기가 엄청 큰 규모엿지? 여기서 5키로 정도 떨어진 공암에도 옹기 공장이 있엇는데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근데 사람들은 그 쪽이 원조인줄 알더라구, 여기 용담리가 원조여 원조.


리포터 :그럼 얼마동안 일 하셨고 왜 그만 두셨나요?
▶▶ 이장님: 5년 일했지. 일 해보니 힘도 들고 재미도 없고(돈도 안되고), 더구나 그 때부터 사양길였어. 80년대 중반이 되니 플라스틱이 하나 둘 들어오고. 그러니 누가 이 무거운 독 항아리를 쓰겄어. 나 같아도 가벼운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농사일도 해야하구 하니 이 참 저 참 그만 뒀지 뭐.


리포터:그러셨군요, 그럼 여기서 일 하시던 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실까요?
▶▶ 이장님: 그건 모르지. 근데 이 동네서도 나를 포함 동네 사람 몇 명은 가마터에서 일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어르신들은 돌아가시고 나만 남아 있지 뭐.
 
 
리포터: 네, 이장님 덕분에 가마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살아 있는 옹기 장인을 만나다.】


용담리가 고향이신 이형석 이장님의 소개로  가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현재 동학사쪽으로 5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에서 감나무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정환님을 만나러  한걸음에 달려갔다. 
 


리포터: 안녕하세요 어르신 용담리 가마터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어요. 용담리가 고향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어쩌다고 여기에서 터를 잡으신걸까요?
▶▶ 김정환 님아 얘기를 하자면 질어~~(길어) 충남 연기군 남면 용담리 산 1번지. 여기가 내 본적 주소여. 원래는 충남 논산군 노성면 장마루 라는 곳인데 어느 날 가보니께 싹 불타버리고 없더라구. 일본놈들이 싹 불태우고 없앤겨(없앤거야). 그래서 호적도 고쳤는디 내가 시방(지금) 83센디 호적엔 72세로 되어 있다니께(있다니까).
 
 


용담리가 제 2의 고향이 되다
 
그래서 고향도 없어지고 6.25로 폐허가 되 버려 갈 곳이 없어 1955년 정도까지 유성 터미널에서 구두닦이 껌팔이 등으로 지내시다가 깡패들 텃세가 너무 심해 맞장뜰(서로 싸우는 일)이 생겼는데 단체로 달려 들어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마침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올라 아무 곳이나 내렸는데 그 곳이 용담리였고옹기공장에 취직하면서 뒤모드(허드렛 일)을 하고 지내다가 눈썰미가 좋아 바로 기술을 익혀 옹기쟁이가 되셨다고 한다.
 

리포터: 그럼 용담리에는 가마에 쓰는 좋은 흙이 많았나요?
▶▶ 김정환 님: 아녀 용담리는 흙이 부족해서 맨 처음엔 조치원 벌미(지금의 오송근처)거 쓰다가 1940년대는 사장님이 월하리 논(현재 조치원 항공학교 앞)을 아예 사서 인부들을 시켜 그 흙을 퍼다가 쓰면서 유성 진토벌(현재 학하동 근처) 흙까지 갔다 썼지. 근데 지금은 그것도 아예 없어서 도자기 맹그는(만드는) 사람들도 울산이나 예산서 오는 흙을 쓴다고 하더라구.
 
리포터 : 옹기는 하루에 몇 개 정도 만드셨나요?
 ▶▶ 김정환 님: 나 혼자서 큰거는 30개 작은거는 200개는 거뜬히 만들지. 내가 이래뵈도 눈썰미가 얼매나(얼마나) 좋은지 도구(물레.발판등 독을 만드는 기구)도 내가직접 맹글어(만들어) 쓰고,야토(산에 있는 흙) 도 만져만 봐도 재(왕겨나 나무를 태운 재료)랑 몇 대 몇으로 섞어야 되는지 척 알아서 일이 수월했지.








 
옹기 만드는 모습
(출처 : 1971년 김정환님 기증)




 
물레에서 독의 형상을 거의 갖춘 모습
(출처 : 1971.김정환님 기증)




리포터: 그러셨군요 용담리 가마골에서 20년간 일을 하시고 떠나셨다는데 떠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일찍 시작 하셔서 아직 더 오래 하셔도 되실 나이셨을텐데요?
▶▶ 김정환 님: 암 아주 큰 이유가 있지 내가 3남매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어렸을 때 길에서 교통사고가 난거야(가마터 바로 앞이 도로이고 커브가 심해서 오는 차가 잘 안 보임). 대가리가(머리가) 으서지고(으깨지고) ~~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데 ... 정나미가 뚝 떨어진거야 그래서 그만 둔다고 했어. 야유회도 가고 재미있게 지냈는데~~~
 


 
1976년 5월 옹기공장 직원들 야유회 기념 사진 (맨 뒤줄 왼쪽에서 6번째가 김정환님)




리포터: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셨나요?
▶▶ 김정환 님: 아녀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지금 여기(공주시 반포면 봉곡리)가 처갓집이고 여기에도 옹기공장이 있었지 예서도 한 10년 하다가 80년 말 돼서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지 뭐.


리포터: 네 어르신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용담리 옹기공장사장님은 주학규님이셨는데 공무원 출신이셨고, 봉곡리 옹기공장보다 늦게 생겼지만 경영을 잘 해 규모는 더 컸다고 한다
.
 
 
 

기억하자 독 짓는 마을 용담리
 

용담리를 거점으로 동학사쪽으로 5Km 정도에 있는 반포면 공암마을도7,80년대까지만 해도 독(옹기)을 짓는 곳이 많았지만 플라스틱이 들어오고도시화가 되면서 이사를 자주 하다보니 보관이 힘들고 이사할 때 잘 깨지는 단점이 있어 점점 독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90년대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용담리에 가마터까지 사라지고 없지만 살아 숨쉬는 옹기를 만드는 공장이 우리 세종시인 금남면 용담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까지 기억했으면 한다.

 
 

 
 
2024.7.기록리포터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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