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미', 처음 보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연동면지』 404페이지를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노송리(老松里)는 옛날부터 노루미·노리미로, 노송이 많아서 '놀뫼'·'노산(老山)'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노산과 송담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노리미'는 연동면 노송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연동면은 예전 연기군 시절에는 '동면'이었죠.
노송리 마을 전경
(출처 : 『연동면지』 p.405)
노리미로 불렸던 노송리, 이 곳에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혹시 '노송공소(老松公所)'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노송은 노송리에서 딴 '노송', 공소는 천주교에서 일반적으로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를 의미하지만 간혹 공소 신자들의 모임 장소인 강당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 되니(출처 :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노송공소는 연동면 노송리에 있는 천주교 교회 명칭입니다.
연기군 시절, 천주교가 처음 연기군에 전래된 곳이 바로 연동면의 노송리, 노리미 마을입니다.
연동면 노송공소
(출처 :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그러면 노송리, 노리미 마을에 천주교가 전래된 때는 언제일까요?
『동면지』(1996) 219~220페이지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 시기, 난을 피하여 강의관(의관:벼슬, 이름: 강만)이라는 사람이 노송리의 이웃마을인 청원군 강내면 사곡리로 숨어와 살다, 1874년에 흥선대원군이 은퇴하면서 암암리에 전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강의관은 노송리의 노리미 마을에 살던 김동명과 배영호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알려주고, 서적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김동명은 공주로 신부를 찾아가 더욱 깊이 교리를 익히고 신부를 도우며 성당 일을 했고, 배영호는 고향 노송리에서 공소 회장직을 맡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노송리의 노리미 마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이 꾸준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동면지』에서는 노리미 마을에 천주교가 수용된 것을 1886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해제되면서 1887년으로 보고있는 반면, 「연기 노송리 경주김씨의 천주교 수용과 공소」에서는 당시 1860년대 공주와 인근 지방에도 신자가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고려, 1860년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 노리미 마을에 천주교가 자리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현재는 알 수 있습니다.
노송공소는 공소로서는 드물게, 신자들이 직접 『노송공소 100년사』를 발간하며 노송공사의 역사를 후대에도 알리게 되었습니다.(출처 : 월간 레지아 마리애 일부 발췌)
이러한 현재를 남겨, 향후에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동면지』(1996)
『연동면지』(2020)
「연기 노송리 경주김씨의 천주교 수용과 공소」(2005) 김수태, 호서사학회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월간 레지아 마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