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우리 마을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려 합니다.
가네코 후미코
(출처: 공훈역사사료관)
세종시의 동쪽, 부강면에는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여성 독립운동가가 계셨습니다. 한글로는 박문자, 영화 ‘박열’에서 열사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로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1903~1926)’입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어린시절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외삼촌 이모에게도, 아니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전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모 집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 나는 나 (가네코 후미코 옥중수기) 中/ 가네코 후미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출생 신고를 못해 학교도 제때 다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내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리 생가
(출처: 교수신문)
1912년 아이가 생기지 않던 고모의 양녀가 되기 위해
부용면 부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의 고모부 집으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삶도 쉽지는 않았는데요. 양녀로 받아들이지 않던 할머니와 고모의 학대 속에 가난과 노동에 시달리며 자라게 됩니다.
부강심상소학교
(출처: 삼버들협동조합)
9살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는 지금의 부강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부강심상소학교를 다녔고, 1917년 14살의 나이로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때 부강에 살며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부강역, 부강의 지형, 부강의 파출소 등을 보며조선에 대한 기억들을 모았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부강리의 주민들이 벌였던 독립운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독립운동은 그녀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으며, 그녀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지만, 여전히 의존적인 어머니, 자신을 이용하려는 아버지를 보며 완전히 독립을 마음먹게 됩니다.
박열을 만나다.
1922년,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놓게 되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열사 ‘박열’입니다.
영화 '박열' 스틸컷
(출처: 씨네21)
대학교 생활과 책을 통해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쿄에서 만들어진 아나키즘 독립운동 단체인 흑도회에 가입하여
박열과 함께 기관지(機關誌)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고, 사상연구와 연설회 등을 추진하면서
기관지(機關誌) 『후토이 센진』, 『현사회』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이즈음 의열단과 함께 의열투쟁을 추진했는데, 폭탄을 도쿄로 반입하여 일왕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926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 지 사흘째,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경찰조사를 받던 도중 이전의 암살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이 사건을 '불령선인의 비밀결사 사건'이라고 하며 대대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고, 당시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동아일보 기사
(출처: 동아일보)
위의 기사와 함께 법정에서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모습의 사진이었기에 일본 사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을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나는 박열이다"라고 답했으며
후미코도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하며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모습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이틀 후인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도 만세를 외치며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이후,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으나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순국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다음은 체포 후, 당시의 신문조서입니다. 조선인과 독립운동에 대한 진실된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如何ナル朝鮮人ノ思想ヨリ日本ニ對スル叛逆的氣分ヲ除キ去ル事ハ出來ナイデアリマセウ。 私ハ大正八年中朝鮮ニ居テ朝鮮ノ獨立騷擾ノ光景ヲ目擊シテ、私スラ權力ヘノ叛逆氣分ガ起リ、朝鮮ノ方ノ為サル獨立運動ヲ思フ時、他人ノ事トハ思ヒ得ヌ程ノ感激ガ胸ニ湧キマス。 그 어떤 조선인의 사상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반역적인 기분을 없앨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이쇼 8년 중에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 소요의 광경을 목격하고 저조차 권력을 향한 반역적인 기분이 들었으며, 조선 분들이 하고 계신 독립 운동을 생각할 때면 남의 일 같지 않게 감격이 가슴에 벅차오릅니다.
-1924년 1월 23일 제4회 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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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감한 스물셋의 박문자, 그녀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노력으로 오늘도 대한민국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선조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동이 잊혀 지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