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다가오면, 우리는 으레 제사준비에 분주해지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유교의 영향으로 생겨나 정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유교가 성행하였습니다. 각 지역에서 중요한 행사는 향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주관했는데, 당시 향교는 단순히 교육기관으로써의 역할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르침을 전하고(향학), 조상을 기리며(문묘), 지역 사회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중심지였습니다.
< 연기향교의 안내문 >
(촬영 : 2025-01-20)
세종시 연기면 연기리에 위치한 연기향교는 바로 이러한 전통을 이어온 공간입니다. 건립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대부분의 지방·군현에 향교가 건립되었던 1407년(태종7) ~ 1413년(태종13) 사이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여러 차례 이전과 중수를 거쳤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연기향교가 위치한 곳과는 달랐습니다.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향교가 ‘현에서 서쪽으로 1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의 위치와 다른 지점입니다. 1824년 간행된 『연기지』에는 연기향교가 ‘현의 동쪽 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이 현재의 위치와 일치합니다. 그 사이 어느 순간에 향교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나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 『해동지도』(1750) 중 연기현 지도 >
위 지도를 보면 연기현 시절의 마을 모습을 간략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 현재 세종시 연기면 주변의 지도 >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산줄기나 물길의 형태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만 몇몇 기록에서는 향교의 이전연도를 명확히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호서읍지』에 1684년(숙종 10년)에 동쪽 5리에서 이전하여 왔다는 기록이, 1933년 발간된 『연기지』에서는 ‘옛 향교가 읍의 서쪽 3리에 있었는데, 1827년에 현의 동쪽 2리에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990년 성균관에서 편찬한 『유교대사전』에는 1647년(인조25)에 현위치로 옮겼다고 나와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모두 날짜가 다르고, 각 문헌에서 밝히거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불충분하여 정설로 채택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의 연기향교가 자리잡은 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의 원칙을 따라 뒤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또한 지역사회의 교육과 유교적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객사나 동헌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되, 지나치게 가깝지 않도록 하여 독립적인 교육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터를 잡은 다음에는 목적, 규모, 형태에 따라 설계하는 포치를 하고, 그 뒤에는 도목수가 도맡아 본격적인 공사 단계로 돌입했습니다.
<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 >
(출처 : 국가유산청)
건물들 아래에는 지면과 이격하여 기단을 쌓았습니다. 기단은 지열을 차단하고 침수를 막으며, 방충 등의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지만, 그 건물의 권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의 형태를 관찰함으로써 당시 향교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는지, 건물의 겉모습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 하마석 >
(촬영 : 2025-01-20)
< 홍살문 >
(촬영 : 2025-01-20)
향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홍살문과 그 옆의 하마석이 보이고, 그 뒤로 정문인 외삼문이 있습니다. 홍살문과 하마석은 원래 이보다 훨씬 앞쪽인 진입로에 세워졌던 것이 이곳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마석은 말에서 내릴 때 사용하는 돌로, 주로 관청이나 궁궐 등의 입구에 놓여져 있던 돌을 말합니다. 단순히 실용적인 용도뿐 아니라 그 공간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말에서 꼭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기에, 그 장소의 격식과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인 셈입니다.
< 외삼문>
(촬영 : 2025-01-20)
현판에는 '명덕문'이라고 쓰여져있다. 밝은 덕을 닦는 길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유교적 가치와 도덕을 중심하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 명륜당 >
(촬영 : 2025-01-20)
외삼문을 지나면 학생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사용된 명륜당이 있고, 그 뒤의 내삼문을 지나면 선현의 위패를 봉안한 묘당으로 사용되는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곳이 향교의 가장 핵심이자 격이 높은 공간입니다. 동편에는 전사청과 대문채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위계가 반영된 건축구조가 구상되었는데, 이는 건물의 이름과 외형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핵심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전사청과 대문채는 그 중요성이 비교적 낮았습니다.
우선 건물의 이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앞 글자들은 건물에 잘 어울리는 단어를 골라 짓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글자는 건물이 가지는 특성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어느정도 정형화된 글자가 옵니다.
< 대성전 >
(출처 :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건물의 넓이는 조선시대에 정면 몇 간, 측면 몇 간, 곱해서 몇 간 하는 식으로 따졌습니다. 예를 들면 연기향교의 대성전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기둥이 6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기둥이 4개입니다. 따라서 정면 5간, 측면 3간, 총 15간의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간수가 많은 건물은 바닥 면적이 넓고, 대체로 그에 비례해 웅장하고 화려해집니다.
향교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대성전은 궁궐과 마찬가지로 가장 권위 있어야 하는 건물에 붙는 ‘전’자가 붙었습니다. 규모가 크고 품위있는 치장을 갖추었으며,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불교 사찰의 조사전이 있습니다.
명륜당의 경우, ‘전’에 비해 규모는 엇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격은 분명히 한 단계 낮은 건물입니다. ‘당’은 공적인 활동보다는 조금 더 일상적인 활동에 쓰였습니다.
< 전사청의 측면 >
(촬영 : 2025-01-20)
전사청의 ‘청’은 행정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으며 실무 공간에 사용되었고, 대문채의 채는 주로 생활공간을 의미하였습니다. 향교의 대문채는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핵심적 역할을 하는 건물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이 강조되었고, 격식을 갖추긴 했으나 건축적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 명륜당의 화려한 단청 >
(촬영 : 2025-01-20)
< 명륜당의 처마 >
(촬영 : 2025-01-20)
겹처마와 이익공 형태, 그리고 화려한 단청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건물의 외형에서 격조를 알 수 있습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지붕의 형태가 겹처마, 즉 이중 지붕으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처마 아래를 받치는 구조물인 공포를 볼 수 있으며, 단청을 채색하여 장식적 기능과 함께 목재의 부식이나 벌레를 방지했습니다. 그에 비해 전사청과 대문채는 홑처마 구조이며, 공포가 거의 없이 매우 간단한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단청 역시 없습니다.
< 대문채 정문 >
(촬영 : 2025-01-20)
현판에는 '연기유문'이라 적혀있다.
< 대문채의 홑처마>
(촬영 : 2025-01-20)
건물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수많은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연기향교가 담긴 다양한 문헌기록이 있습니다.
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학교등록』에 따르면, 1680년(숙종6)에 ‘만설’이라는 연기현 사람이 역모를 저지렀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연기현이 약 5년간 폐지되어 문의현과 합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연기향교는 간간히 수리(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중수기록은 1865년(고종2), 송래희가 저술한 연기현학 명륜당중수기에 나와있습니다. 현감 이태진이 1862년(철종13)에 부임하여 향교를 둘러보았는데 향교의 시설이 낙후한 것을 보고 서재의 기둥과 지붕 기와 등의 수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1879년(고종16) 서재 중수(현감 송명노, 연기현향교중수기)와 1901년(고종38) 전사청 중수(홍재전, 전사청중수기) 등 여러 중수기에 연기향교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수기록은 향교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운영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 위에서 내려다본 전사청(우)과 대문채(좌) >
(촬영 : 2025-01-20)
이처럼 많은 기록 속에 연기향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 지역이 예로부터 마을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초기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그 역사가 이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건축적 특징과 중수기록 등 다양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 공간의 의미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연기향교가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고, 어떤 맥락에서 그 정체성을 유지해왔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연기향교는 마을 안의 단순히 오래된 유적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지역 공동체 내에서 지녔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마을 정체성의 뿌리가 됩니다.
< 멀리서 보이는 대성전 >
(촬영 : 2025-01-20)
연기향교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설날을 맞아 이 기록을 돌아보며, 향교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중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향교의 의미를 새삼 되새깁니다. 이 작은 마을의 역사 속에서 향교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함께 나누며, 우리 또한 그 가치를 이어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