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초수(全義椒水)는 2004년 3월 9일 지정된 우리지역의 향토문화유산이다. 이곳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상대부 마을에 위치해 있다. 차령산맥의 흑성산 줄기인 월조산 아래 고개를 기점으로 천안시 성남면과 경계지점에 접해 있다. 전의초수가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임금은 다음해인 세종26년 1월 눈병에 시달렸다. 그 후 세종 27년 2월까지 1년여 동안 세종 임금이 전의초수로 눈병을 치료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펜스가 처진 전의초수 전경>
(촬영 : 25-2-13)
1997년 발간된 전의향토지에서도 초수(초정)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정(椒井)
탑고개에 있는 우물이며 천안 성남면과 경계지역이다. 이 물은 세종26년(1444)에 세종이 한글을 연구하다가 피로에 겹쳐 안질이 생기자 그 안질을 고치기 위하여 그해 3월 2일부터 5월 2일까지 청주 초정에 머물렀었다. 그 때 여기 초정보다 더 좋은 곳을 물색하다가 4월 병조판서의 제청에 의하여 목천 초정 두 곳과 전의 초정 네 곳을 추천하고 6월 1일 내섬사윤(內贍寺尹) 금침(金浸)의 답사 보고에 의하여 가을에 이곳에 행궁(行宮)을 짓고 명년에 거동하기로 결정하고 그 해 윤7월 22일에 안질이 있는 이내은(李內隱)과 김을생(金乙生)을 이곳에 보내어 치료를 시험해 보고 그 이튿날 또 전종포서령(前宗布署令) 장택(張澤)과 신타(信를打)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며, 가을 목천 대정리에다 행궁을 지으려다 민폐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같은 27년(1445) 2월에 전의 초정물을 병에 넣어 서울로 올려다가 바르고 마셔서 낳았다 한다. (연기실록)
지금은 물줄기를 잠가 놓았지만 이곳에서도 수도꼭지를 틀면 잠겨있던 오백 전, 물줄기가 콸콸 쏟아진다. 쉼터에 있는 전의초수는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물을 마실 수도 있고 유료로 초수를 구입할 수 있도록 물통을 판매한다.
<전의초수 쉼터 >
(촬영 : 25-2-13)
블로그나 SNS에 전설처럼 왕의 눈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천편일률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전의초수. 그런 기록이 정말로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전의초수는 언제부터 ‘왕의 물’로 불리게 되었을까?
< 물줄기가 잠겨있는 전의초수>
(촬영 : 25-2-13)
세종 임금은 재위 기간 중 어느 시점에 전의초수를 마시고 눈병이 호전되었으며 초수를 어떻게 대궐까지 운반하여 사용했을까? 세종 임금의 눈병 치료과정과 시골 약숫물에서 어떻게 ‘왕의물’로 신분 상승을 했는지 그 과정을 세종실록에서 날짜순으로 정리해보았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26년(1444년) 1월 27일 >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초수(椒水)로 눈[眼]을 씻어서 효험(効驗)을 본 사람이 많다. 전일(前日) 행차하였을 때에 호종(扈從)한 자가 그 물을 마시고 혹은 효험을 본 자가 있으며, 혹은 효험이 없는 자도 있고, 혹은 설사가 났으나 오래지 않아서 도로 나은 자가 있으며, 전 중추원사(中樞院使) 윤번(尹璠)은 한 달 동안에 이르도록 마시었어도 마침내 효험을 보지 못하니, 초수를 마신다고 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여부(與否)는 역시 확실히 알 수 없다. 지난번에 초수를 마시어서 병을 치료한 자가 하나뿐이 아니니, 아무개는 아무 병이 나았고, 아무개는 아무 병이 낫지 않았다는 것을 갖추 자세하게 조사하여 아뢰라.”
전일에도 세종 임금은 전의초수에 행차해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초수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조사하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의초수에 대한 세종 임금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초수로 눈을 씻었다는 기록은 안약 대용으로 썼을 가능성을 추론하게 한다.
<세종실록105권, 세종 26년(1444) 7월 4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한 달 후, 세종 임금은 충청도 관찰사 김조(金銚)와 경기 정역 찰방(京畿程驛察訪) 이백견(李伯堅)에게 유시(諭示)를 내린다.
“내섬시윤(內贍寺尹) 김흔지(金俒之)의 말을 듣고, 이어 그가 가지고 가는 사목(事目)을 살펴본 뒤에 초수(椒水)를 올려보내는 일을 흔지(俒之)와 함께 곡진(曲盡)하게 조처하라”
임금이 충청도 관찰사 김조와 경기 정역 찰방 이백견에게 유시한 7가지 내용은 오늘날 전의초수가 ‘왕의 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되었다.
전의초수 운송관련 7가지 유시내용
1. 전의(全義)의 초수(椒水)는 각역의 잘 달리는 말 두 필씩을 선택하여 초수를 실어 보내는 일에 전용(專用)하고 다른 일에 쓰지 말 것.
2. 초수에는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사리를 알 만한 자 2인을 선택하여 감고(監考)로 정하고, 몸이 건장(健壯)한 자 3인을 선정(選定)하여 칭호를 압직(押直)이라고 하고, 매일 감고 1인과 압직 1인이 윤번(輪番)으로 지키게 하되, 관(官)에서 아침저녁의 식사를 제공할 것.
3. 연도(沿途)의 각역에서는 초수(椒水)를 압직(押直)하고 운송하는 자 3인을 선정할 것.
4. 전항(前項)의 초수를 운성할 때에 각역에서는 말 두필과 압직(押直) 3인이 윤차로 입직하고, 서로 휴식하면서 차례로 돌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게 할 것.
5. 전의의 초수는 입번(入番)한 감고가 매일 해질녘에 초수를 사기그릇에 넣고 기운이 새지않도록 하여 봉함하고 서명(署名)한 뒤에, 그때의 시각과 이를 실은 역마의 이름을 적어서 압직인에게 주고, 압직인은 다음 역의 압직인에게 전한다.
이렇게 급히 체송(遞送)하여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 도착하여 바치게 하라. 만일 지체하는 일이 있으면 찰방과 역승(驛丞)을 그때 즉시 처벌할 것.
6. 초수 운송을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찰방·역승 등을 경솔하게 검거하지 말 것.
7. 지금 보내는 사복시(司僕寺)의 말 여덟 필은 각역의 빈한(貧寒)한 역자(驛子)에게 나누어 주어 초수를 운송하게 하라.
<‘천안 성남면’과 ‘전의’ 경계에 있는 전의초수 우물비>
(촬영 : 25-2-13)
초수를 운송할 말은 해질녘 전의를 출발해서 서울을 향해 밤새 달려 다음날 궁궐에 도착했다. 그 물로 세종 임금은 눈병 치료를 했다. 지금은 전의에서 서울까지 차를 타면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를 말을 타고 10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세종실록105권, 세종 26년(1444) 윤7월 22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원문
○遣眼疾人李內隱同、金乙生等于全義椒水, 治療以試之, 仍命本縣賜衣。
8월에는 눈병을 앓는 사람인 이내은동(李內隱同)·김을생(金乙生) 등을 전의(全義)의 초수(椒水)에 보내어 치료하여 효력을 시험하게 하고 현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옷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은 세종 임금이 전의에서 궁궐까지 물을 운송 받아 치료한지 20일 후의 내용이다. 그 후 세종실록에서 이내은동(李內隱同)과 김을생(金乙生)의 흔적은 묘연하다.
<세종실록107권, 세종 27년(1445) 2월 18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전의초수 운송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충청도 감사 김조(金銚)가 도사(都事) 박건순(朴健順)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지난해 봄에 초수(椒水)에 거둥하시어 치료하신 효력이 있사와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삽더니, 가을에 또 거둥하시어서는 효력을 얻지 못하시었다 하오니, 신은 생각하옵건대, 추운 가을철의 물이 온화한 봄철의 물만 못한가 하옵니다. 요사이 듣자오니, 역마로 전의(全義)의 초수를 서울로 올려온다 하옵는데, 대저 물이라는 것은 그 근원을 떠나면 본성을 잃어버리옵니다. 거룩하신 마음에 충청도가 작년에 흉년이 들었는데 만약 초수에 거둥하시면 폐단이 백성에게 미칠까 하여서, 금년 봄의 거둥을 정지하시려고 하시오나, 신은 생각하옵건대, 충청도는 쌓아 놓은 곡식이 여유가 있사오니 간혹 굶주린 백성이 있다 할지라도 어찌 진휼하기가 어렵사오며, 더군다나, 전번 거둥하실 때에 판출(辦出)에 수응하는 여러 가지 일을 간소하고 절약하도록 힘써서 본도에는 관계가 없이 되었사온데, 무슨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었겠사옵니까. 청하옵건대, 거둥하시어서 신민들의 소망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정부와 육조가 청한 것을 내 이미 윤허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다시 말하지 말라."
임금이 거처할 행궁을 짓고 치료받으라는 신하들의 충언을 세종 임금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가뭄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을 염려하여 행한 조치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임금이지만 행궁을 짓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걱정하는 세종 임금의 애민정신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눈병 치료는 세종 27년(1445), 2월18일을 끝으로 전의초수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1년 여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임금의 안질이 완쾌되었다는 문건은 확인하지 못했다. 세종 임금이 초수를 마셨는지 눈을 씻어냈는지 사용방법도 확인하지 못했으며 주치의인 어의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쉼터 벽에 붙어있는 전의초수 성분 및 효능 분석표>
(촬영 : 25-2-13)
세종 임금은 이 전의초수를 안질(眼疾, 눈병) 치료에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의초수가 세종 임금의 눈병에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을까? 세종실록에는 후추 맛이 난다고 표현되어있는데 광천수, 즉 물에 특정 광물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충북 청주의 유명한 탄산수인 초정약수처럼 탄산이 포함되어 철분이 함유된 경우 금속성 맛이 나기도 한다. 또한 유황이 함유된 물은 자극적인 맛과 향이 느껴질 수도 있으므로 전의초수도 이와 비슷한 성분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눈병은 세균성 결막염, 안구건조증 혹은 염증을 말한다. 전의초수 성분에는 인공 눈물의 성분인 나트륨, 칼슘, 칼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눈을 적절히 촉촉하게 유지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을 것이고 자연 탄산수가 포함된 물로 세안을 할 경우 미세한 자극이 혈액순환을 돕고 눈의 염증을 사라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임금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육식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당뇨를 앓았을 가능성이 예측되므로 당뇨 환자는 빈혈 위험이 높은데, 철분이 포함된 전의초수를 섭취하면 몸속에서 산소를 운반하여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왕의물로 표지판>
(촬영 : 25-2-13)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전설처럼 떠도는 전의초수의 효능과 세종 임금의 눈병치료 과정을 세종실록에서 톺아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도’ 속, 초승달을 보고 남녀가 만났던 오백년 전 그날, 월식이 일어났다는 것까지 추론해내는 첨단문명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전문기관에 전의초수 성분분석을 의뢰해서 어떤 성분이 왕의 눈병 치료에 효과가 있었는지 과학적으로 밝혀 보는 일은 어떨까? 마을기록가의 입장에서 전의초수를 팩트(fact)에 입각해서 분석해보는 일은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흥미로운 일이다.
오백년 전 시간이 샘솟는 전의초수,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세종실록에 여러 차례 기록될 만큼 중요한 물이었다. 언젠가 이 물의 성분과 효능이 과학적으로 분석된다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얼마나 일치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