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는 예로부터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이름난 곳으로,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자주 찾던 마을이다. 지금의 미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리, 미당리, 지곡리, 수구동 등이 통합되며 형성되었고, 이후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으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운주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 300~400m의 산지가 많고, 산세가 험한 구릉지대에 밭을 일군 마을이다. 운주산, 동림산 등의 자연경관과 함께 조천 상류가 흐르는 미곡리는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농촌마을로, 오늘날에도 조용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미곡리 수구동길 안내 표지판
(촬영 : 2025년 3월 25일)
이 평화로운 마을 안에는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꺼내기조차 힘든 깊은 상처가 숨어 있다. 바로 '수구동', 옛 이름으로 '피숫골'이라 불린 계곡이다.
< 미곡리 마을 >
(촬영 : 2025년03월25일)
< 미곡2리 마을 표지판 >
(촬영 : 2025년03월25일)
< 운주산 초입 >
(촬영 : 2025년03월25일)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휴전국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한 나라라고 평가를 한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역사에는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시기가 있다. 전동면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의 격전지였다.
수구동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하던 곳이었다. 운주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어 피난처로 적합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참혹한 비극을 불러왔다.
수구동 계곡
(촬영 : 2025년03월25일)
『전동면지』(2011)에 따르면, 당시 이 일대에는 전의, 전동지역은 물론 천안 인근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적의 염탐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작은 냇가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하여 그곳을 “피숫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이름이 너무 끔찍하다는 이유로 ‘수구동’으로 바뀌었다.
『조치원읍지』(2012, pp218-219)에 따르면 연기군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인해 당시 연기군에서 1950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열흘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동면지』(2011, pp164-166)에는 미군의 딘 소장이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금강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부대에 지시하였다고 한다.
특히 개미고개에서는 미군과 북한군 간의 전면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동면은 단순한 지리적 요충지를 넘어, 피의 전장이자, 두 번이나 비극을 겪은 땅이다.
2025년 3월 25일, 필자가 미곡리를 찾았을 때는 오가는 이 하나 없이 너무도 조용했다. 그렇게도 험하고 슬픈 고통을 겪었던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나뭇가지의 흔들림, 잎새가 내는 잔잔한 소리들이 귀에 맴돌았다. 마치, 여기에서 그런 일이 있었냐며 되묻는 듯했다.
그날은 아무도 오가지 않았고, 고요한 침묵만이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이전에는 얼마나 잔혹한 비극을 품고 있었는지를. 그 기억을 잊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이곳이 우리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근의 고산사를 방문해보니, 마치 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듯 염불과 목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러한 지역의 역사에 대해 미곡리의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 싶어 몇몇분을 만나보았다. 집에서 농사를 준비하시는 분, 트랙터를 이용하여 거름을 주고 계시는 분, 고산사 사찰을 찾으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다들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셨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역사는 잊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다.
필자도 주변을 돌아보면서 기록으로 남겨 보고자 사진을 찍으면서도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미곡리는 오늘도 조용하고 아름답다. 운주산의 품에 안긴 작은 마을, 그 속에 흐르는 조천의 물소리.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이 품은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 너머,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과거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