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살아갈 때, 주소는 그저 나를 표시하는 행정적 숫자와 글자들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세종에 이주를 한 후 아름다운 우리말로 이루어진 지명을 접하면서의 마을의 시작과 지명의 유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연동면 마을기록문화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 >
(촬영 : 2025.4.17)
그 물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연동면 마을기록관에 보관된 몇 권의 책을 펼쳤고, 그 안에서 한 마을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연서면 국촌리였다. 이 국촌리라는 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지명에 국화꽃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보고, 나의 호기심이 자극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서면 국촌리 마을을 직접 탐방하고, 그 여정을 담아보았다.
국촌리는 고려 시대에는 청주 관할, 조선 시대에는 전기현에 속했다가, 조선 말기엔 연기군 서면이었다. 1914년, 국촌리·독동리·대박리·후동리가 통합되어 연기군 서면 국촌리가 되었고,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과 함께 지금의 연서면 국촌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은 안산(鞍山)을 경계로 국촌1리와 국촌2리로 나뉘며, 200여년전 제일 먼저 국촌리에 터를 잡은 선조는 기계유씨 동정공파 유덕기 였다. 낙향을 하면서 배산임수형으로 살기 좋은 곳이라는 판단에 터를 잡아 기계유씨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국촌리는 국화가 많아 ‘국촌(菊村)’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외로이 핀 한 송이 국화에서 ‘독골’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국촌리 입구 >
(촬영 : 2025.4.21)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3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 국촌리의 풍물패는 연기군에서 풍물패 경진대회가 열리면 언제나 1등이었다고 한다. 집성촌의 특성인 화합과 결속력은 어느 마을보다 강하고 우애가 좋다고 마을 이장을 세번이나 하셨다는 마을 어르신 유만길님(85세)께 들을 수 있었다.
“국촌리에서 태어나면 농악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모두가 다 할 줄 알았지. 대회 나가던 어느 해는 공주 농고에서 선생님을 모셔와 밤마다 보름동안 연습 했어. 농악은 인원이 42명이 있어야 하
고 여자도 12명이 소고를 해야 되는게 농악이야.”
(개인인터뷰. 2025. 4. 21.)
국촌2리라는 지명보다는 예로부터 덕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덕촌(德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기록된 연서면지의 글과 같은 말씀을 유만길 어르신께도 들을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천성이 착실한 기계유씨가 고아가 된 정동(鄭童)을 거두어 키웠는데 영특한 그는 후에 크게 성공하여 전라도에서 큰벼슬을 하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자신을 키워준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동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묘지를 정해 안장하고 이 마을을 후한 인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후덕동’, ‘후덕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매년 정월초에 여인들이 시루떡과 정안수를 놓고 마을의 평안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샘 고사를 지냈다는 후덕골샘을 후덕골 중간쯤에서 찾았다. 한참을 걸어도 보이지 않던 후덕골 샘은 길 아래 아무런 표시 없이 오래된 녹이슨 양철을 덮고 있었다. 혹시 하고 양철을 들추니 맑은물 가득 담고 있는 후덕골샘. 그 속엔 하늘 구름과 빛바랜 플라스틱 바가지가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아직도 맑은 물을 가득 담고 있는 후덕골 샘 >
(촬영 : 2025.4.21)
길 옆 정자에서 쉬는 동안 마을 어르신(유만길님)을 만나 후덕골샘을 확인하면서 국촌리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수돗물이 집까지 들어오지만 그땐 동네 사람들이 먹는 귀한 샘이었어. 어머니 계실 때 고사를 지내는걸 봤는데, 샘고사 안지낸지는 한참 되었지. 내가 이장을 맡았을 때 세종시에 샘에 지붕이라도 씌워 달라고 건의를 했지만 안되었어. 지금 저 상태가 새마을 운동 때 시멘트 바른게 마지막이야. 저기 벽에 내가 '새마을운동'이라고 시멘트 마르전에 손가락으로 썼는데... ”
(개인인터뷰. 2025. 4. 21.)
샘 이야기가 끝나자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 길 아래 샘으로 가셔서 시멘트 벽을 손 바닥으로
문지르시며 그 시절에 새겨 놓은 글씨를 찾으셨다. 필자도 함께 문지르다 보니 마른 이끼와 시멘트벽 부스러기가 떨어지면서 정확한 글씨 대신 희미하게 패인 곳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후덕골 샘에는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가 빌었던 마음이 아직도 고여있는 듯 했다. 지금은 샘고사가 사라졌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샘처럼 고여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국촌리 이야기를 들려주신 유만길(85세) 어르신
(촬영 : 2025.4.21)
사람의 이야기가 국화처럼 피어 있는 마을, 덕이 머무는 마을. 화려한 명소도, 거창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국화 향기처럼 잔잔한 국촌리 이야기는 마음에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후덕골샘 보존에 대한 생각을 남기며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