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영화에서 조선 단종대의 재상 김종서(金宗瑞, 1383~1453)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때 조정의 최고 권력자로서 정국을 이끌었던 그는 계유정난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무덤은 오늘날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에 남아 있다.
< 장군면 대교리에 있는 김종서 묘소 >
(출처 : 디지털세종문화대전)
장군면의 옛 지명은 공주시 ‘장기면’.
김종서가 이 지역에 묻히며 ‘장군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장군면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김종서의 이름 뒤에는 흔히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기도 했다. 그가 북방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한 업적은, 오늘날 한반도 북동부 국경선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 전반을 살펴보면, 군인이라기보다 문관으로서 정치와 행정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김종서 묘소는 1746년(영조 22년)에 세워졌으며, 세종특별자치시 시도기념물 제2호로 등록되어 있다. 태어난 곳과는 불과 6km 떨어져 있다.
< 김종서 초상 >
(출처 : 순천김씨종친회 홈페이지)
그의 이름이 깊이 새겨진 것은, 죽음 이후였다. 1453년, 어린 단종을 지키기 위해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을 막고자 하다 계유정난으로 살해당한 그의 최후는, 훗날 영조대에 와서야 복권되며 ‘충절의 상징’으로 재조명되었다.
그가 이곳에 묻히게 된 연유에 대한 전설도 전해진다. 능지처참을 당한 김종서의 시신 중 한쪽 다리를, 현장을 지켜보던 말 한 필이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은 한양에서 고향 공주까지 단숨에 달려와 숨졌고, 말이 몰고 온 다리를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을 ‘한 다리’라 불렀고, 후에 그것이 변형되어 지금의 대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한동안 공식 역사 기록에서 지워져 있었다. 성종대에 편찬되고 중종대에 보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인물조에는 김종서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도 공주의 읍지나 지리지에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학문적 역량과 정치적 공적을 감안하면, 만약 그가 ‘역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조선 중기 이후 그에 대한 평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고, 영조·정조 대에는 본격적인 신원과 선양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김종서가 태어나 묻힌 공주 지역에서도 요당서사와 숙모전이 세워지며, 지역민의 자발적인 제향 활동이 이루어졌다.
김종서의 생애는 조선 초기의 격동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227년간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 인물이 단지 권력투쟁에서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역 사회의 기억에서조차 배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무덤은 세종시 땅 위에 있다. 우리가 이 묘역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그가 묻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역의 기억과 기록, 그리고 묻혀버린 정의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이곳에 함께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