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이름 뒤에 존재하던, 이름이 없는 조선 시대의 여성
필자의 돌아가신 조모님 성함은 이송죽(松竹)이다. 한산 이씨로 살아오시던 조모님은 일제강점기 호구 조사 당시, 조사원이 이름을 묻자 조부님께서 사랑채에 앉아 즉석에서 송죽 (松竹)이라 지어주셨다고 한다. 한학을 하셨던 조부님은 조모님의 이름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었지만, 그 이름은 조모님의 삶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식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열녀(烈女) 정려(旌閭)의 명칭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현재는 ‘열녀 밀양손씨, 창녕성씨 정려’로 불리지만, 과거에는 남편의 이름을 앞세워 “김기철 처 밀양손씨, 김성흠 처 창녕성씨 양세 정려”라고 불렀다. 이는 수많은 밀양손씨 중에서 김기철의 아내임을, 수많은 창녕성씨 중에서 김성흠의 아내임을 구분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이름이 다소 길긴 하지만, 단지 본관만으로 표기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또한 이 정려를 시댁인 광산김씨 가문에서 모셔야 할지, 본가인 밀양손씨 가문에서 모셔야 할지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연기군에서 세종시로 행정구역이 이관되며 명칭을 정리할 때, 담당자들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문득, 이 두 열녀가 집안에서 실제로 불렸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세종시 유일의 양세(兩世) 열녀 정려
세종시 향토문화유산 중 열녀 분야의 정려는 총 13개이며, 이 중 2개는 LH에서 해체 보관 중이다. 현재 답사가 가능한 정려는 11곳이며, 그 중 연동면에 4개, 연서면에 3개가 집중되어 있다.
필자는 과거 밀양박씨 가문의 박천붕과 그의 아들 4명이 전장에서 순절한 ‘밀양 박씨 오충 정려’를 답사한 바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가문 출신의 두 며느리가 대를 이어 열녀로 포상받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는 당시 권세가문이었던 안동김씨 가문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일이며, 세종시에서도 유일한 양세 열녀 정려이다.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필자의 조사 방식은 현장 안내문, 면지나 군지, 향토문화대전, 구글링, 간단한 논문이나 서적, 현장 탐방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깊은 사료를 통한 검증에는 한계가 있어 늘 아쉬움이 남는다.
김기철(金基喆)의 처 밀양손씨(密陽孫氏)
밀양 손씨(1838년생)는 어려서부터 부덕을 익히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동기간과도 우애가 깊어 ‘여자 선비의 기풍’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16세(1853년)에 안동김씨 가문의 김기철에게 출가하였으나, 임신 4개월 차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겨우 17세의 나이에 유복자를 품고 절도 있는 상장례와 3년상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김성흠(金聖欽)의 처 창녕성씨(昌寧成氏)
창녕 성씨(1872년생)는 성재현의 딸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18세(1889년)에 김성흠에게 출가하여 20세에 아들을 낳았으나, 1891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성흠은 밀양손씨가 유복자로 키운 아들로 추정된다. 부자 모두 결혼 직후 사망했으니, 안동김씨 가문의 침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다산(多産)이 미덕이었기에, 두 대에 걸쳐 가장(家長)이 요절(夭折)한 상황은 가문에 큰 위기였다. 그러나 밀양손씨는 아들 김성흠이 훌륭한 가정을 꾸려 대를 이은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가정 교육에 힘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을 보듬고 완성하는 것은 결국 어머니의 몫이 아니던가.
지도 검색이 안되는 열녀 정려
이 양세 정려의 위치는 세종시 연동면 내판리 271-1이다. 구글링을 통해 확인하면 ‘연동면 내판리 상리마을’로 표시되며, 대대로 살아온 본가의 건너편에 위치한다. 『연기군의 뿌리를 찾아서』 1권 동면편(현재의 연동면)에 따르면, 내판리는 청주사씨 연기파와 안동김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답사 중 아쉬웠던 점은, 효자나 충신의 정려는 네이버 지도 검색이 잘 되지만, 열녀 정려는 이름이 등재되지 않아 지번을 외워야만 검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직접 인터넷 등록을 해볼까 고려했지만, 막상 정려 이름이 길거나 모호하여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열녀 밀양손씨 정려’라면 동일 본관의 정려가 여러 개일 수 있고, 이를 "김기철의 처 밀양손씨 정려"라고 한다면 또한 어색하다. 향후에는 정려 이름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여 지도에 등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찾아가는 길
인근 골목길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아도 밭 가운데에 위치한 정려의 진입로를 찾지 못해 두리번 거리다가 큰길로 다시 내려오니 앞에 길이 나 있었다. 무성한 풀을 헤치고 다가가니 드디어 양세 정려에 닿을 수 있었다.
양면 2간의 정려
정려는 2위를 모시려는 뜻에서 각각의 정려를 1칸씩 짓고 중간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구분하였다. 두 칸이 붙어있지만 각각 독립된 구조를 갖고 있는 보기 드믄 정면 2간, 측면 2칸인 양면 2칸 규모의 정려이다. 대부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려이기 때문이다.
명정이 내려진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가?
이 명정이 하사된 연도가 명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성상즉위41년 갑진 11월을 근거로 따져보자. 우선 조선 왕조에서 41년 이상 즉위한 임금은 14대 선조(1567-1608, 41년), 19대 숙종(1674-1720, 45년), 21대 영조(1724-1776, 51년), 26대 고종(1863-1907,43)으로 4명인데, 이 명정은 고종 41년 1904년에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즉위 41년차가 갑진년인 왕조는 고종이고, 또한 당시 내판리에서 거론되는 안동김씨 가문의 김유복(1740-1815), 김백열(1816-1868) 등이나 안동김씨 안렴사공파가 이곳에 내려온 시기 등을 감안하면 고종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열녀 정려에 대한 시대적 관점
열녀 정려의 열행 내역을 보면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였다던가, 남편이나 시모를 모시려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었다거나, 결혼 직후 남편이 사망하자 유복자를 품고 평생을 시댁에서 시부모를 봉양하고 조상을 섬기면서 수절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열행이지만, 당시 여성들은 유교적 교육을 통해 가문과 가정을 지키는 것을 숭고한 책무로 여겼다. 항간에서는 남자들의 압력에 의해 피치못하게 수절했다거나, 가문에서 억지로 꾸며댔다거나, 앞날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등 요즘의 가치관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대 사대부 집안의 양반 규수들은 내훈(內訓), 삼강행실도, 소학, 가례, 동몽선습 등 유교 문화 아래에서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엄하게 배웠다.
남성은 밖으로는 과거에 급제하여 왕조에 충성하고, 조상과 부모를 효성으로 모시며 가문을 번창하는 것이 소명이었다면, 여성들은 그 뒤에서 집안을 이끌고 자손을 번창하면서 안살림을 도맡는 등을 소명으로 삼고 주도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에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조선 500년동안 왕조가 다양한 원인으로 흔들리면서 본래의 사대부들의 선비 정신도 정체성을 잃고 시대가 혼미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을 지배하는 정신은 여전히 건강한 유교 사상이었으리라. 그런 측면에서 여성들을 지배하는 대표적 문화는 갖은 어려움을 숙명으로 여기고 가문을 지키고 대를 이으면서 가문을 지켜내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남성들의 전부인 충이나 효에 대응하는 거룩한 소명이었다.
지금도 이런 정신이 이어져서 가정을 소중하게 가꾸고 지켜내는 중심에는 여성, 그리고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이런 여성이 있는 집안은 번창하게 되고 흔히 여자가 잘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단순히 억압받은 존재가 아니라, 시대적 가치 속에서 가문을 지키고 자손을 이끈 중심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며, 처절하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문을 지켜낸 이들이었으며, 이런 문화가 조선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중에 특히 훌륭한 여성에게 왕이 정려를 내렸으리라. 대를 이어 집안을 지켜낸 안동김씨 가문의 밀양손씨, 창녕성씨 두 여인에게 위로를 표한다.
[참고 자료]
연기문화원(2002), 『 연기군의 뿌리를 찾아서 제1권: 금남면, 남면, 동면』
이희완(2001), 『 조선시대사학보: 조선말기의 정려와 가문 숭상의 풍조』
조치원문화원(1996), 『 동면지』
세종문화원 세종향토사연구소(2015), 『 향토세종 : 3집』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세종시 양세 열녀 정려] (https://sejong.grandculture.net/sejong/toc/GC07700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