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추석은 한 해의 수확을 돌아보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맘때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농촌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이 유난히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들판에서의 풍년과 흉년, 마을 단위로 열린 크고 작은 행사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까지 모두가 가을 한가운데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번 월담에서는 연기군과 관련된 10월의 신문기사만을 모아보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10월의 추석을 맞아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이번 글에 실린 기사들은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으며 현대어로 다듬어 읽기 쉽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작권법을 준수하여 활용하였음을 명시합니다.
황성신문 / 1901. 10. 08.
연기군수 이범소는 농상공부에 보고하기를, “연기군 금광에 폐단이 많아 내무부의 전보 지시에 따라 폐쇄했으며 내무부의 명령 없이는 다시 열어볼 수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광산 관련 사무가 이미 내무부로 이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내용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니, 이는 매우 안타깝고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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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당시는 대한제국 시기로, 중앙정부와 지방 행정 사이의 혼선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군수는 금광 운영이 어려워 내무부 지시에 따라 폐쇄하였다고 밝혔지만, 보고 대상은 여전히 농상공부였습니다. 문제는 이 무렵 광산 관련 업무가 농상공부에서 내무부로 이관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기관의 권한이 실질적으로 우선하는지 불분명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제도적 전환기에서 나온 행정 혼선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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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 1905. 10. 11.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이 전하기를, 충청남도 연기군 일진회 회원 중 회덕에 사는 김상준과 청주에 사는 배씨 두 사람은 본래부터 불량한 무리였는데, 일진회 회원이 된 뒤에도 행실이 극도로 방탕했다고 한다. 또 연기군에 사는 아전 우선창과 장교 윤상철도 불량배로 이름난 자들이었는데, 머리를 깎지도 않고서 일진회 회원이라 자칭하였다.
이 네 사람은 뜻을 모아 온갖 폐단을 일으켰는데, 민가에서 돈을 뜯어내거나 술주정을 하며 행패를 부리고, 길 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제멋대로 때리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마침내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범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멀리하며 감히 나무라는 자가 없었다.
온 고을이 원성으로 들끓기를, 악한 관찰사나 탐관오리의 횡포보다 더 심하다고까지 하였다. 일진회의 취지가 얼마나 엄정한데, 회원 자격을 빌려 이런 패악을 저지르니, 해당 회에서 이 사실을 탐문할 경우에는 단순히 제명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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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이제 불량한 학생들 무리를 일컫는 단어로 익숙한 ‘일진회’는 1904년에 결성된 친일 성향의 정치단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본의 보호정책을 지지하고 한일합방을 찬성하는 등, 곧바로 식민지 지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근대적 정당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지역 사회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기능했으며, 그 때문에 해방 이후까지 ‘일진회’라는 이름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실제 지역 현장에서는 회원 자격이 도덕적 권위로 작용하기는커녕, 오히려 폭력과 횡포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쓰이곤 했습니다. 위 기사에서도 보이듯, 많은 이들이 회원 신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며 지역민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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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 1905. 10. 13.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율리에 사는 과부 임소사는, 이웃 마을의 21살 총각 윤지동이 동료들을 이끌고 자신을 납치하려 하자, 호미를 휘둘러 윤지동을 죽이게 되었다. 이 사건은 재판에 넘겨졌으나, 충청남도 재판소는 형법대전 제88조 ‘정당방위’ 조항을 적용하여 임소사를 무죄로 방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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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연기군 서면 율리에서 발생한 형사사건으로, 과부 임소사가 납치하려던 청년을 호미로 제압해 사망에 이르게 된 내용이다. 사건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충청남도 재판소는 형법대전 제88조 정당방위 조항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주목할 점은, 당시 지방에서도 정당방위가 법적으로 적용되어 실질적인 면책이 내려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근대 형법이 실제 사건 처리에 사용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과적으로 임소사는 범죄자가 아닌 정당한 자기방어자로 인정되었고, 이는 지역 법률 운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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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 1919. 10. 08.
연기군 가마니 만들기 경연대회
10월 2일 오후 1시부터 조치원소학교에서 가마니 만들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3명의 감독관이 참석한 아래 경기는 오후 5시에 종료되었고 1등 2명, 2등 3명에게 각각 상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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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쌀을 담는 포대로 가마니가 아닌 섬을 사용했습니다. 섬은 짚을 엮어 만들었으나 촘촘하지 않아서 낱알이 작은 곡식을 담으면 새는 양이 많았고, 그 크기도 커서 사람이 이고 지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가마니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는데 비교적 짜임새가 조밀하고 규격화된 형태였기 때문에 점차 곡물운반에는 가마니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위의 기사에서 보듯 가마니를 만드는 대회도 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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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1949. 10. 30.
한청종합훈연성황
1949년 10월 25일, 연기군 금남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대한청년단 금남단부가 종합훈련대회를 열었다. 6월부터 이어진 훈련의 성과를 점검하기 위한 행사로, 군수와 서장, 단부 간부를 비롯해 지역 유지들이 참석했다. 총 1,200명이 참가했으며, 성적은 화사부락부가 1등, 용포이구부락단부가 2등, 용포오구부락단부가 3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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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연기군 금남면에서 열린 대한청년단 종합훈련대회는, 막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남짓한 시기에 진행된 행사였습니다. 당시 농촌 지역 청년단은 친목 단체가 아니라 반공과 치안 유지, 동원 체계를 담당하는 준군사 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훈련대회에 군수, 경찰서장 등 관료들이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청년단은 사실상 국가 권력과 긴히 연결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00명이라는 규모를 드러내어 당시 불안했던 사회 분위기를 강한 반공정서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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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4. 10. 09.
삼기국민교체육회
1954년 9월 30일, 연기군 전의면 삼기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단순한 체육 행사뿐 아니라, 질서 정연하게 진행된 민병대의 사열식도 함께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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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의 농촌 학교 체육대회는 학생들끼리의 운동 경기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지역의 축제 같은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기사 속에 함께 기록된 ‘민병대 사열식’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국가와 사회는 여전히 안보와 반공 의식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교 체육대회 같은 공동체 행사에도 군사적 색채가 가미되었고, 민간인으로 조직된 민병대가 대중 앞에서 행진과 사열을 선보이며 ‘안보의식 고취’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마을주민들에게도 이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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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56. 10. 04.
간첩에 사형언도
1956년 10월 3일, 군 당국은 육군 8171부대 고등군법회의에서 허봉서(28)에게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고 발표했다. 허봉서는 6·25 당시 아군에 생포된 인물로, 석방 후 국군에 입대해 군사기밀을 수집하다가 제대 후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에서 고용농으로 일하며 지역 정세를 탐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월북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간첩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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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전형적인 1950년대 반공 보도의 한 단면입니다. 6·25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 간첩은 실재의 위협이면서 동시에 체제 결속을 위한 상징으로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기사 속 허봉서의 사례는 지역 농촌 사회와 국가 안보를 직결시키는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라는 작은 농촌 마을이 등장하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간첩이 농사일꾼으로 위장해 지역에서 생활했다는 설정은 농촌 사회마저 간첩 활동의 무대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당시 사람들에게 “어디서든 간첩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지역 소식이라기보다는 전후 한국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반공 담론이 강하게 묻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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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59. 10. 25.
교통법규를 지키자
조치원 원상동 일대를 위험할 정도로 초스피드로 달리는 충북 군 관용 지프차들이 있다. 어린이들이 뛰노는 길을 시속 30마일 전후로 질주하는데, 이는 법규를 성급한 타이어에 깔아뭉개는 행위와 다를 바 없으니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정 바쁘다면 몇십 분 일찍 출발하면 될 일이다. 공연히 세기적 스피드 기질을 이기지 못해 자신과 남을 불행에 빠뜨리는 경망한 짓은 말아야 하며, 법과 질서를 앞장서 지켜야 할 기관 차량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일반의 지탄은 더 커질 것이다.
그들은 단속을 받지 않는 듯하니 횡포가 더욱 심해지는 것인가? 그러나 조심성 없는 자의 앞날에 사고가 없으리라 누가 장담하랴. 노련한 운전수일수록 급할수록 교통법규를 지켜야 하고, 무사고를 위해 평소의 훈련과 교양을 쌓아야 한다. 끝으로 운전수를 둔 책임자들의 철저한 지도를 기대한다.(연기군상무회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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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950년대 후반, 교통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촌과 군 단위 지역에도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나타난 사회 문제를 보여줍니다. 특히 군 관용 차량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권력을 상징했기에 주민들에게는 어느정도 불안감을 유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조치원 같은 읍내 지역에는 아이들이 길가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풍경이 흔했는데, 도로와 놀이터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공간에서 차량의 과속은 새로운 사회적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글쓴이가 지도층의 책임을 강조한 것은 교통 질서의 확립보다는 어떠한 관용차를 매개로 드러나는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사는 교통법규 준수라는 주제를 통해, 1950년대 말 농촌 사회의 변화와 긴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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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1959. 10. 28.
지나친 자모들 수업참관
수일 전 볼일이 있어 K시에 갔다가, 모 국민학교 1·2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교실에는 많은 학부모들이 가득 들어와 법석을 떠는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녀의 학업을 알고 싶어 수업을 참관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조용히 참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수업에 간섭하거나 자기 아이를 응원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은 글을 읽는 자기 자녀에게 교사보다 큰 소리로 “더 크게 읽어라” 하고 호통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다른 아이의 크레용을 빼앗아 자기 자녀에게 쥐여주거나 그림을 대신 그려주기까지 했다.
이처럼 한가한 도시살림의 심심풀이로 수업을 방해하는 참관은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 일에 쫓겨 교실에 오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불공평한 영향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횡포는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하며, 기를 쓰고 학교로 쫓아다니는 ‘사모님’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바이다.(연기군 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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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미있는 기고문은 1950년대 후반, 교육 제도가 정비되던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사회 현상을 보여줍니다. 전쟁 직후 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학부모들이 교실 수업을 직접 참관하는 풍경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는 학교의 이슈들이 1950년대에도 존재했고, 그 당시의 치맛바람도 요즘 못지 않게 거셌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기고문에서는 교사의 권위와 아이들 간의 공정성을 침해하는 과도한 간섭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글쓴이는 이를 ‘사모님들의 심심풀이’로 표현하며, 교육의 장이 가정의 연장선이 아닌 독립적 공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당시 농촌·도시를 막론하고 형성되던 신흥 중산층 여성들의 여가 문화와 자녀 교육 열기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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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70. 10. 18.
수학여행 식중독도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충남 연기군 남면 연남·연양 두 국민학교 어린이 152명과 인솔교사 2명이 무허가 식당에서 만든 도시락을 먹고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다. 이들은 시립중부·남부병원 등 11개 병원에 나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고는 17일 오후 2시쯤 용산역 앞에서 발생했다. 열차를 기다리던 연남국민학교 6학년 학생 132명이 중구 도동1가의 황정자 씨가 운영하는 무허가 식당 도시락을 먹고, 이영회(13) 군을 비롯해 93명이 잇달아 증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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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농촌 아이들에게 수학여행이란 흔치 않은 큰 행사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 관광을 하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당시 교육문화의 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열악했던 위생 관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무허가 식당에서 대량으로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수십 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후속 보도가 이어집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콘텐츠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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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1976. 10. 15.
육상 5천m 신기록 박원근군 스태미너 뛰어난 육상호프
1974·75년 전국체전에서 고등부 5천m와 20km 단축마라톤 2종목을 연패한 그는, 올해 일반부 첫 출전에서도 5천m 한국신기록을 다시 단축하며 주목받고 있다. 대전대성고 1학년 때 육상을 시작해 장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지난해 12월 일본 보후(호후시) 10km 단축마라톤을 제패했고, 올해 3월 동아마라톤에서는 첫 풀코스 도전에서 2시간 18분 2초로 우승해 육상 중흥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번 전국체전에서는 마라톤 출전을 위해 본래 주종목인 1만m는 포기했다. 170cm, 56kg의 이상적인 체격과 탁월한 스태미너를 갖춘 그는 앞으로도 신기록 경신이 기대된다. 현재 조폐공사 소속으로, 중학교 시절까지는 배구 선수였다.
그는 충남 연기군 남면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박태준 씨(60)의 2남 1녀* 중 막내다.
*2011년 충청투데이의 인터뷰에서는 5남매라고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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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러닝은 하나의 주요한 생활문화로 자리잡았습니다. 세종시의 호수공원이나 금강변, 삼성천을 가보면 아침저녁으로 뛰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러닝 붐이 일고 있는 와중에, 사실 연기군에서도 이미 잘 달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1970년대 전국체전과 동아마라톤 무대를 누비며 이름을 알린 장거리 주자 박원근씨입니다.
박원근씨는 대전시 생활체육회 상임부회장을 지내고, 2025년 현재 대전시의 비상임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미 2011년 충청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도 선수 시절의 경험을 회고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지역 체육 발전과 생활체육 확산에 기여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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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1990. 10. 10.
벼베기 품삯폭등 농민들 애타
작년보다 최고 55% 올라 2만5천원 줘도 일손달려
추수철을 맞아 충남 연기군 남면에서는 벼베기 품삯이 전년도보다 크게 올라 농민들의 부담이 커졌다. 기계로 벼를 베고 건조까지 해주는 비용은 1마지기(약 200평)에 4만2천 원으로, 지난해 3만 원보다 1만2천 원이나 상승했다. 단순히 베어 운반만 해주는 경우도 2만1천 원으로, 전년보다 6천 원이 올랐다. 농촌 인력의 고령화와 이농 현상으로 인한 인력 부족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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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990년대 농촌의 구조적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농사철마다 품삯이 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노령화’와 ‘이농’이라는 사회적 맥락이 기사에 명시적으로 언급된 점이 눈에 띕니다. 기계화가 이미 보편화되었음에도 인력이 달려 품삯이 폭등한 현상은, 농촌의 노동시장이 빠르게 위축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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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모아본 기사들은 모두 10월에 실린 것들입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한가운데서 농촌의 수확과 어려움, 지역사회의 행사, 때로는 사건사고까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0월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렴풋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만을 살펴본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직접 경험하고 피부로 느끼는 것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기에 당시를 기억하거나 떠올려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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