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기록, 월담, 밤절
'밤절'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밤절', 한자어로 '율사(栗寺)'. 말 그대로 먹는 밤과 사찰인 절의 합성어입니다. 밤절이란 단어는 우리 시 금남면 영대리에서 손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도로명주소가 '둔대밤절길'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밤절은 알았는데 '둔대'는 무슨 뜻일까요? 『연기군의 지명 유래』 239페이지를 보면 둔대(屯垈)란 고려 때 거란의 군사들이 침입하여 진을 쳤던 곳으로, 진칠 둔(屯)자와 터 대(垈)자를 써서 둔대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대리에는 양둔대가 있는데 영대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오르면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두 길에서 밤절 쪽이 음지라하여 음둔대라 하고, 그 건너편 마을은 양둔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도로명주소에도 남아있는 '밤절'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반정으로 왕이 되었지만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왕, 바로 '인조'와 관련된 이야기로, 1624년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 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까지 도망치게 되었던 기간의 일입니다.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1』 137쪽과 『금남면향토지』 380쪽을 보면, 옛날에 절이 있고, 밤나무가 무성하나 열매가 열지 않다가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에 피난한 후부터 밤이 열기 시작했는데 그 밤이 탕기만큼 커서 임금에게 진상했더니 인조가 맛있게 먹고 밤절이라 하사하여 붙여진 이름이 밤절이라고 합니다. 원래 절의 이름은 청림사(靑林寺)였다고 합니다.
* 인조와 밤절에 관한 세부적인 이야기는 『금남면향토지』 967~969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혹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며 밤을 먹거나 율사라는 이름을 하사한 내용이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을까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당시 인조가 2월 12일에 천안에 있었고, 13일에 떠나 14일에 공주에 도착하였으니, 큰 밤을 먹은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13일과 14일이 사이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실록을 확인해보니 인조는 2월 18일에 전의현(全義縣)에 머무르며,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그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괄이 후퇴하자 다시 상경을 하는 길에 전의현을 통해서 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록이 아닌 다른 기록에서도 밤절(율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연기지』69쪽 보면, 설화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栗寺 在錦南面永大里古靑林寺俗傳
仁祖大王駐蹕于公州
怪而問曰此栗何其大且味耶
僧無能實獨一株有實而其大若此也
仁祖曰寺之左右多栗樹今伐則全無能實獨一株有實而其大若此也
命改寺名栗寺云
율사(栗寺)는 금남면 영대리에 있다. 옛 이름은 청림사(靑林寺)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인조대왕이 공주에 머무를 때(피난길에) 이 절의 밤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으셨다.
"이 밤은 어찌 이처럼 크고 맛이 좋은가?"
승려가 대답하였다.
"절의 좌우에 밤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베어져 열매 맺는 나무가 한 그루뿐인데, 그 열매가 이처럼 큽니다."
이에 인조가 말하였다.
"절의 좌우에 밤나무가 많았다가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한 그루만 남아 열매를 맺는데도 이처럼 크구나."
그리고 절 이름을 고쳐 '율사(栗寺)'라 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1930년대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고, 현재까지 지명으로도 남아있는 이 큰 밤과, 밤절(율사)이라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건, 현재 이 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향토지 뿐만 아니라『세종연기이야기(향토사료 제1집)』 에서는 율사의 지번이 당시 '충남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 산45-1, 산3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산45-1번지는 존재하지 않고, 산35번지는 지도 검색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