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부 정려 기록을 위해 자료를 찾던중 현대사람 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기록은 기록가가 판단하여 기록에서 제외하였다 예를들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먹였더니 병이 금방 낫더라 등 이와같은 경우는 기록에서 제외시켰다 물론 근거 없는 사실임에도 효부임을 강조하려고 기록을 한 줄은 알고 있으나 자연 스럽게 제외 하였음을 미리밝힌다
이 정려는 현 주소지인 응암리 산 45번지에 세워졌으며 시기는 1877년 고종 14년에 명려. 정문 건립, 1962년 정려를 정면 1칸 측면 1칸,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서 양측면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고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8각 고주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정려 4면은 홍살 처리 하였으며 창방 위에는 2개의 화반 대공을 놓았다 그리고 중앙에 세워진 비석정려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1877년에 명정받은 열녀 사인(士人) 박기정의 처 광산김씨 정려임을 기록한 명정 현판이 열녀 사인 박기정처 유인광산 유인 김씨 지여 숭정후오 병자 성상13일 11월 일 명정(171 × 35 烈女 士人朴基正 妻 孺人光山金氏 之閭 崇楨後五 丙子 聖上13年 十一月 命族 )이 걸려 있다 또한 중앙에 세워진 비석은 1900년에 세운 것으로 화강암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옥계형 이수를 올렸으며 전면에는 열녀 사인 박기정처 광산김씨 지여 (烈女 士人박기정(朴基正, 妻 光山金氏 之閭)라고 새겨저 있고 나머지 3면 에는 1950년에 성기운(成璣運) 이 추기(追記)하고 병서한 정려기가 음각되어 있다. 이 정려는 열녀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그당시 지방에 행차 했던 도백이 김씨의 열행 듣고 나라에 보고하여 1877년(고종14년)에 명정을 받았다 이 정려기는 1877년 명정받을 당시 우의정 송근수가 글을 짖고 민영태가 글을썼다 그러나 당시는 현재와 같이 정녀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깃집의 대문에 명정현판을 게판하는 형태 것 같고 그후에는 종가의 사랑채 들마루에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손들은 항상 정려가 건립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중 신기하게도 1944년 돌무더기가 한 달 가량이나 계속 떨어지는 이변이 계속되자 집안에서 돈을 내어 100일간 경을 읽었다고 하며 이를 기화로 김씨의 현손 박용래등이 1952년 4월에 정려를 건립하고 명정 현판의 내용을 음각한 정려비의 3면에 성기운이 찬한 정려기를 음각하였다 1955년(을미년) 상량한 대들보가 남아 있으며 1965년에는 청기와로 지붕을 단장 하였다 그러나 2∼3년 후 기와를 새로 올렸으며 1980년대 말 군의 보조를받아 보수하여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열녀 광산김씨는 광성군 김국광의 후손인 김귀택의 딸로서 무안박씨 가문의 박기정(1792∼ 1830)에 출가 하였는데 혼례를 치룬 3일후 처가에 갔을때 뜾밖에도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었다 김씨가 지성으로 간호 하였으나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김씨는 3년간 시묘에 정성을 다하고 수절하면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당진에 사는 먼 친척 아이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무안박씨가 동면에 처음 들어온사람은 함일, 선일, 행일 의 3형제 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들의 선대는 당진군 고대면 전관리에서 세거 하였는데 17세기 중반경에 맏형 홍일만이 당진에 남고 3형제가 모두 연기지역으로 이주 하였다. 박함일,선일,행일이 동면으로 이주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는 함일의 처가 경주김씨인데 경주김씨가 동면의 토성이자 대성인 점 선일의 처가가 동면 응암리 마을에 세거하고 있던 청주한씨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처가가 있는 인연으로 동면에 정착 하게된겻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연기에 정착한 박선일은 영녀 김씨의 남편인 박기정의 고조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공준길의 문하에서 공부 하였다 부모상을 달하여 시묘를 하는데 흰제비가 날아와 집을 지었는데 새끼 또한 횐색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제비도 선일의 효에 감동된 것이라 하여 여러 차례 나라에 알렸다고 한다 증조인 창과 조부인 동환, 아버지인 병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4대가 모두 읍지에 효자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열녀 광산김씨는 이와같이 대대로 효성이 지극한 짐안에 출가하여 집안의 전통을 이었고 양자인 응현 또한 그 전통을 물려받아 지극한 효성으로 세금을 면제 받았다 열녀 김씨의 묘소는 동면 응암리 산 42번지 에 있다 열녀 김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여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 하였으며 삼강오륜의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다, 덕망 높은 가문에서 예의범절을 두루익히며 자린 rlaT는 무안박씨 가문의 박기정에게 출가 하였는데 박기정은 이미 초혼에 사별하고 김씨와 재혼한 것이었다 무사히 혼례를치룬 3일 후에 뜾밖에도 남편 박기정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혼의 꿈이깨진 김씨는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밤낮으로 간호 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생가다 못한 김씨는 천지신명께 기도하고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원 하였다 김씨가 약을 다리다가 깜박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두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그 중 한 노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내가 너의 시아버지다 어린나이에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고치려고 간호 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치하의 말을 끝낸후 “여기 이 약으로 고생한 네 다리를 고치거라〃 는 말을 나기고 사라져 버렸다 김씨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옆에 시아버지가 건내준 약이 있어 그것을 바르니 다리가 씨은듲이 나았다고 한다 아마 남편의 병을 고치기위해 여러방면으로 수소문하여 좋다는 약을 구하려 여기저기 뛰어 다니다 보니 자신의 다리가 이미 병들어 못쓰게 되어음을 몰랐던 모양 이었다 그러나 그년의 정성으로 잠시 의식을 되 찾는 듲 하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남편의 빈소를 지키던 광산김씨는 극약을 마시고 그뒤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는때 친정 숙모의 꿈속에 다시 두 노인이 나타나더니 “급히 내 새 며늘아기를 구해 주시요 하거늘 깜짝놀라서 급히 달려가서 구해내고 말하기기를 남편이 죽어서 후사가 없으니 너는 마땅히 슬픔을 참고 살아서 양자를 들여 조상을 받들게 하는것이 너의 직분이라 하니 유인이 이에 관대히 참고 상여를 따라 남편의 집에와서 삼년을 시묘 살이를 하고 난 후 일가집 아들 응현을 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다 선영이 남에게 늑장을 (남이 나의 묘 가까이 씀)을 당해서 여러차래 소송을 제기 했으나 패소함에 유인이 구년동안 하늘에 기도를 하고 열손가락을 다베어 혈서를 써올려서 써 마침내 그묘를 파내게 된것이다 아! 세상이 말하는 열녀는 살을베고 약을먹고 자결을 하고 마음을 들여 종신토록 의리를 지키고 양자를 들여 조상을 받들었고 위로는 죽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아래로는 종갓집을 무궁하게 뻗치게 했으니 한낱 의리를 따라 죽는데 비할바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대소(大小) 는 비록다르나 진실한 행실은 괴로움에 어렵고 쉬움을 얻은것이라 하나 이런고로 고종 병자(高宗 丙子:서기 1876년)에 마을 앞에 정려를 세운 것이 이같이 빛난것이라 내 가 바야흐로 천지가 들끊고 삼강오륜이 없어진 때를 만나서 다만 걱정을 할 뿐 구제할 힘이 없는데 유인의 현손 용례(容來) 가 정여에 기문을 청하니 말세에 융희 권선징악(勸善懲惡)이 됨으로 힘을 내어 찬양하라라 기원후 경인모춘(1950년 3월)에 쓰다(1950年 三月) 붓을들어 글쓴이 : 성기운 기함
출처
(1) 자료 수집 2026년 6 월 자료를 수집하기위해 응암리 이장(박종록) 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 상당히 반가워 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하기로 함 (2) 개인 소장 사진·자료 [형식] 개인 소장의 자료는 전각 관련 내용을 탁본한 탁본 기록만 남아 있으며 기타 자세한 자료는 면사무소, 문화원,이외는 찾기가 어려움 (3) 작성자 직접 촬영 사진 전부 필자가 직접 촬영 한 것임 (4) 지역지·신문 기사 기록을 찾지못함(없는 것으로 사료됨) (5) 향토사·지역 단행본 2001.5 향토유적지정 대상 문화재 등록현황 자료-2001.5월 연기군 발행 2015년 7월 세종향토사 발표대회 자료집 백제의 얼, 세종에 새기다 기록 책자 연기 향교지지 2008년2월 발행 발행인 전전교 박종관. 이해준 공주대 교수,윤윤종(공감엔터테이먼트)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1권-2011년 12월 연기문화원 발행 동면편 지은이:임선빈,남정환,윤윤종 연기군지(하권)2008,4 연기군지 편찬위원회, 연기군청 문화 공보과 연기군지 1988,12 연기군지 발행 편찬 위원회 연기군 충,효,열 유적 1998, 12 연기군,공주대학교박물관-공동 발행 (6) 보고서·행정자료 지역 향토집등 관내에서 기록 보존책자 에는 많이 분포되어 있음 (7) 학술논문 없는 것으로 판단됨 (8) 웹자료 전혀 참고로 하지 않음 ※블로그, 나무위키,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인터넷 상의 문헌 등 사용 불가 웹자료는 참고용, 보조용으로만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