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_역사

절재 김종서 선생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아카이브 담당자
게시일 2026.08.05  | 최종수정일 2026.08.13

 

글 / 지역문화기록가 박숙연

   얼마 전 화제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영향으로 단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선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김종서장군 역사테마공원’(세종시 공식 명칭)을 찾는 발길이 예전보다 많아졌다고 한다.
필자가 2016년 경 중학생이던 아들과 선생 묘역으로 자원봉사를 다니던 시절묘소의 초입 길은 문화재 입구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지 못했다공주시 관할 당시 공주에 문화재가 워낙 많아 선생 묘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세종시 관할로 바뀐 후 세종시의 대표 역사문화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성역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년 후인 2026, 지역문화기록가 활동을 하면서 그곳을 다시 방문했는데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어 보였다.
 
<사진1. 2017년 김종서선생 묘역 자원봉사 중>
<사진2. 2017년 김종서선생 묘역>
<사진3. 2026년 김종서선생 역사공원>

사무실에 들러 종친 김상대 종무도유사(향교서원종중 등에서 실무를 총괄하는 대표자)의 전화번호를 받게 되어 만날 수 있었는데 김종서선생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어 하는 그와의 2시간이 금방 흘렀다그는 2012년 세종시가 출범되자 절재 역사공원 조성을 제안했고 그 동안 자문위원으로 주도한 전 과정을 한반도 국토를 확장한 명재상 김종서 절재역사공원백서라는 책에 모두 담았다.
 
<사진.4 ‘한반도 국토를 확장한 명재상 김종서 절재역사공원백서’ 책을 든 김상대 도유사>

# 탄생과 관직생활

김종서(본관 순천, 자 국경, 호 절재, 시호 충익)1383(고려 우왕 9)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나 이곳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김종서유허지로 지정되었다. 사헌부 지평(5)이었던 할아버지 김태영이 순천과 서울의 중간인 공주에 집을 마련하여 이때부터 순천 김씨가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1405년 문과 급제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문관이었음에도 1433년에는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어 8년 동안 함경남북도에서 기마민족으로 사냥을 하며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을 개척함으로써 국경을 두만강 이남까지 확장했다. 북방 개척 장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벌인 잔치 상에서 변방의 무관들이 문신인 선생을 얕잡아보고 쏜 화살이 술독에 적중했지만 작은 몸집의 공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연회를 마쳤다고 한다. 그 때부터 선생은 큰 호랑이 대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5. ‘6진 개척’으로 넓혀진 국경선>
<사진6. 술독에 꽂힌 화살> (북관유적도첩-야연사준도)

김 도유사로부터 선생의 ‘6진 개척시절에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계유정란 때 선생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장남 이름이 김승규이고 차남삼남의 이름도 김승벽김승유로 자 돌림인데 선생에게 자 돌림의 아들들(목대석대)도 있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 의문이 풀리게 된 이야기다. 선생이 6진을 개척한 후 여진족 회유책으로 생포한 여진족 추장의 딸 설리(선생이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그녀에게 지어주었다고 한다)를 후실로 들여 낳은 아들들이 바로 목대와 석대였던 것이다.

"설리 할머니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큰 몫을 하셨어요.. 죄인이 되어 문서로 된 기록이 전무했는데 조상 이야기들을 후대에 전해주셨고, 무엇보다 후손들을 여기저기로 피신시켜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어요.. 그 분이 안 계셨으면 우리 가문이 이만큼도 남아있지 못할 거예요
<사진7. 김종서 가문(3명의 적자와 2명의 서자) 피해 상황> (절재역사공원백서 P54)
<사진8. 절재선생 친필 가훈>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사람마다 모두 조옥을 좋아하니 나는 자녀가 어질기를 바란다,
지극히 즐거운 것은 독서에 있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근검에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를 가법으로 삼아라)
 
# 죽음

한양으로 돌아온 선생은 문종 때 형조,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우의정이 된 이듬해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붕어하고 13세의 단종이 왕이 되자 수렴첨정 할 대비가 없었기 때문에 선생은 좌의정이 되어 임금을 보필했다.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의정부가 권력 중심부가 되자 수양대군과 종친세력의 반감이 커졌고 그들이 결국 단종 1년 계유정변을 일으켜 의정부 권력을 장악한 후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고 곧 왕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선생을 철퇴로 참살할 때 큰 아들 승규가 막아서며 먼저 죽고 선생은 겨우 살아났다. 새벽 단종을 지키기 위해 숭례문에서 숭의문 까지 갔지만 대궐 문을 열어주지 않아 들어가지 못하고 숨어 있다가 선생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은 수양의 무리에게 잡혀 결국 참살되었다.
(만약 이 때 장군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해본다.)

이후 선생의 가문에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쓰여 진다. 절세 미모와 무예를 갖춘 공의 후실 설리가 세조의 청혼을 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설리는 후일을 기약하며 거짓 승낙해 세조를 안심시켜 얼마간의 말미를 얻은 후 서소문 밖 저자에 효수된 선생의 머리를 밤에 몰래 수습했다, 이를 선생의 외가인 전의와 생가인 공주를 오가며 숨어 대기하고 있던 둘째 아들 김승벽의 손에 전달해 장군면 대교리 현 김종서장군 묘역에 암장(남몰래 시체를 파묻는 것으로 300년 후 영조 때 봉분을 마련하여 매장할 수 있었다.)하게 되었다, 임무를 다한 설리는 황해도 천축사로 가 비구니가 되었다. (정설로 여겨지며 선생의 애마가 300리를 물고 온 선생의 다리 한 쪽을 묻었다는 한 다리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 죽음 이후

이후 세조의 자손들이 계속적으로 왕위를 이으면서, 태종, 세종, 문종, 단종 4대 왕을 섬긴 충신 김종서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에 대한 신원 복원과 함께 죽임당한 신하들과 연좌된 가족, 친척들도 모두 복원되었고 단종의 무덤인 장릉 배식단에 단종 위해 죽은 충신 268명의 위패가 모셔졌다.
선생도 1746(영조 22)에 복관되었고 충익이란 시호로 신원복관(원통함을 풀고 박탈되었던 신분을 회복시킴)되었으며 영조가 손수 제문을 지어 예조좌랑을 묘소에 보내 제사를 올렸고 충신정려 현판을 하사했다. 선생의 형제와 자손 17명이 연좌되어 참형과 교형에 처해지거나 관노로 영속됐는데 설리의 지혜로 살아남은 자손들이 논산, 익산, 순창, 담양 등지에 세거하게 되었다.
<사진9. 절재 신원복관 교지> (1746년(영조 22))
<사진10. 충신 정려>

#장군의 후예 1 : ‘공주의 남자

필자가 재미있게 봤던 2011년 드라마 공주의 남자조선 후기 문신 서유영이 선생의 장남 김승규의 삼남 김행남(드라마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주인공을 선생의 삼남인 김승유로 했다.)과 세조의 장녀 세령 공주와의 사랑이야기를 저술한 금계필담을 모티브로 했다.
아버지 세조의 불의에 반기를 든 세령 공주는 대궐을 뛰쳐나가 충청도 보은 깊은 산골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친절한 총각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총각은 선생의 장남 김승규의 셋째 아들 김행남이었고 공주와 공주의 남자는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자식을 낳고 잘 살았다. 김행남은 그의 유모가 자신의 아들과 바꿔치기해 살려낸 끝에 선생의 대를 잇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단종 모후의 꿈 속 저주로 피부병에 걸렸다는 세조가 요양 차 보은 온천에 왔을 때 세령 공주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하게 된다. 세조는 세령 공주에게 용서해 줄 테니 가족과 함께 궁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공주의 가족은 오히려 행적을 감추고 사라진다.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 때 세조의 연(임금의 가마)을 가로막았던 소나무의 처진 가지가 스스로 들어 올려 길을 열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비까지 피하게 해주었다 하여 세조가 이 나무에 정2품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사진11. 드라마 ‘공주의 남자’ 포스터> (2011년 방영)
<사진12. 정2품 송>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장군의 후예 2 : 사계의 여자

결국 공주의 남자김행남은 논산 채운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의 5대 손녀이자 선생의 7대 손녀가 선생의 원통함을 씻기 위해 논산 지역에서 발전한 조선 시대 기호유학,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갔다. 광산 김씨 사계의 아들 둘을 낳고나서야 선생의 후손임을 밝히며 공의 신원복관 도모를 부탁하지만, 사계는 단종대왕의 복원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대신 사계는 자식 대에서라도 이일을 도모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녀에게 조상을 생각하고 기린다는 뜻의 염선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결국 그녀 생전에 대역적이 된 조상의 한을 풀지 못했지만 선생의 신원복관이 이루어진 후 광산 김씨 중중에서도 논산에 그녀의 이름을 딴 사당 염선재를 건립해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김종서 선생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이야기다.

 
# 김종서장군 역사공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2013년부터 시작된 묘역 성역화 사업이 확대되어 절재 역사공원 조성으로 추진되었다. 2018년까지 1단계로 묘역 정비와 사당·재실 건립, 주차장 조성 등이 추진됐고, 2024년까지 2단계로 어울림마당과 생태놀이마당, 주차장 확대 등이 진행되었다. 총사업비 300억 원 이상이 투입됐지만, 지가가 높은 토지 보상 문제로 예상보다 많은 사업비와 시간이 소요되어 계획보다 성과가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3단계로 종친회에서 기념 사업회를 사비로 조성해 5개년 계획을 세워 여러 가지 사업과 기념관 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중앙광장과 군영 체험장, 가족쉼터, 북방개척 전투조형물, 수목원과 생태연못 등이 들어서고 가족단위 피크닉장과 힐링·휴식 공간도 마련, 체류형 공원 기능도 부여한다고 한다.

죽기 전에 절재 기념관을 건축해서 선생의 업적과 유물을 한 장소에 전시해 후손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진13. 기백의 울림 사업 팜플렛 및 교육 현장> (2026.8.2.승승장군협동조합제공)

이미 김종서 역사테마공원은 김상대 도유사의 말대로 활용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세종의 영웅 김종서 선생의 기백을 빛과 영상으로 되살려내는 기백의 울림이라는 융복합 예술교육이 20267월부터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완성된 작품이 제14김종서장군문화제에서 선보인다고 하니 김종서 역사테마공원은 지금 분명 역사의 산 교육현장이다.
필자는 지역문화가로 살면서 지역문화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지역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들을 기록해 세상에 알리며 보람을 느낀다. 더불어 우리 지역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또 그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