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면_역사

일제강점기, 연기 지역 출신 한 학생의 학업 기록을 담다

아카이브 담당자
게시일 2026.08.05  | 최종수정일 2026.08.05



 

글 / 지역문화기록가 장방례


일제 강점기에 옛 연기군 서면 봉암리(현 연서면 봉암리)에서 출생하고 자란 고() 윤용균씨(1903년생)의 연기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 및 상장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의 졸업증서를 통해 당시 엘리트 코스의 학업 이력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 교육기관의 명칭 변화와 제도적 추이, 졸업증서와 상장의 작성 서식 등을 엿볼 수 있는 근대 교육사의 소중한 원본 자료이다.
 
1919년 연기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38×27.5cm)
1919년 연기공립보통학교 상장(38×24cm)


위 사진 2장은 19193월에 받은 연기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와 상장이다. 3대에 걸쳐 107년 동안이나 보관해 온 희귀한 자료이며 일제 강점기 당시의 교육기관 명칭, 졸업증서와 상장의 작성법 등을 알 수 있다. 연기공립보통학교 졸업은 19193.1만세 운동이 일어난지 20일 후에 행해졌고, 이를 통해 당시 새학년도가 4월에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졸업장과 상장이 한자와 일본어로 작성된 사실을 통해서는 당시 나라 잃은 우리 선대 학생들의 시대적 아픔과 고통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한편, 일제 강점기 이전 봉암리의 교육은 1651(효종 2) 설립된 봉암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암서원의 교육은 200여년 지속되었으나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사교육 기관이었던 개인 서당이 교육을 맡아오다 1904년에 봉암리 삼락당에 세워진 마을 교육기관 기양학교에서 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4년 지속되었던 기양학교는 1908년 연기리에 설립된 배달학교로 흡수되었고, 배달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12510연기공립보통학교로 승격, 개교하여 근대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연기공립보통학교는 현재 연남초등학교의 전신으로 연기군내 최초의 정규보통학교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학교는 기양학교로, 기양학교는 1904년에 교육이념이 투철한 윤준식과 한일동 2인의 노력으로 봉암리 삼락당에 설립한 마을학교였다. 기양학교의 교육 정신은 마을 주민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지금도 기양학교터를 학교 마당으로 부르며, 학교 마당에서는 1960년대에 해마다 마을 연극이 공연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봉암2리 마을회관이 세워져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증서(38.5×27cm)


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증서는 윤용균씨가 1924년에 받은 것으로 1919년 연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뒤에 받은 것으로 당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의 전신)학제가 5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는 학교명과 수업 연한이 여러번 바뀐 끝에 1921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면서 수업연한도 5년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문학사 학위 수여증서(53.5×39cm)


위 경성제국대학 졸업증서 사진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정해진 시험을 합격하여 문학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므로 이를 증명한다는 내용의 졸업증서(학위수여증)이다. 경성제국대학은 현재 서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립되었던 유일한 제국대학으로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로 개편 통합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는 1926년에 개설되어 1929~1930년경 첫 졸업생들을 배출했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대학이었고, 입학 자체가 매우 어려웠으며 특히 사학과를 졸업해 문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증서의 보존 상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한자 표기 및 총장, 학부장의 직인, 발행 번호 등이 매우 명확하게 남아 있어 가치가 높은 근현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위 자료를 통하여 우리 고장 봉암리의 한 학생이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한국 최고의 정규 교육을 받은 사례를 알 수 있으며 이는 영특한 개인, 교육에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집안과 마을이 함께 힘을 모아 이룩한 큰 성취였고 자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