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글에 실린 기사들은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으며 현대어로 다듬어 읽기 쉽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작권법을 준수하여 활용하였음을 명시합니다.
지난 ‘10월의 기록, 월담’에서는 연기군과 관련하여 10월의 기사만을 모아 소개하였었는데요. 그중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1970. 10. 18.
수학여행 식중독도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충남 연기군 남면 연남·연양 두 국민학교 어린이 152명과 인솔교사 2명이 무허가 식당에서 만든 도시락을 먹고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다. 이들은 시립중부·남부병원 등 11개 병원에 나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고는 17일 오후 2시쯤 용산역 앞에서 발생했다. 열차를 기다리던 연남국민학교 6학년 학생 132명이 중구 도동1가의 황정자 씨가 운영하는 무허가 식당 도시락을 먹고, 이영회(13) 군을 비롯해 93명이 잇달아 증세를 보였다.
1970년대는 농촌 아이들에게 수학여행이란 흔치 않은 큰 행사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 관광을 하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당시 교육문화의 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열악했던 위생 관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무허가 식당에서 대량으로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수십 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번 주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어진 여러 후속보도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며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루 뒤인 1970년 10월 19일, 경향신문에는 다음 기사를 통해 상황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에 수학여행 온 충남 연기군 남면 연남·연양 두 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 209명과 인솔교사 9명 등 218명이 무허가 식당에서 만든 도시락을 먹고 집단 식중독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시립남부·중부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음 날 오후 모두 회복되어 귀가했다.
연남국민학교 학생 132명은 이영찬 교감(46) 등 교사 5명이 인솔해 16일 오후 서울에 도착, 남산 구경 후 중구 도동의 덕흥여인숙에 묵었다. 연양국민학교 학생 77명은 임헌건 교감(51) 등 4명의 교사가 인솔해 같은 날 오전 상경, 경일여관에 묵었다. 두 학교 모두 17일 오전 여관 인근 무허가 식당(주인 박정자·32)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창경원에서 점심을 먹었고, 이후 학생들이 차례로 구토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연남국민학교 이갑규 군(13) 등 일부 학생은 창경원에서 이미 증세를 보였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가 용산역에 도착하면서 90명이 집단으로 쓰러졌다. 연양국민학교 학생 59명 역시 비슷한 시각 증세를 보여 중부병원으로 옮겨졌다. 문제의 식당은 창녀촌 안에 있는 6평 남짓한 무허가 판잣집이었으며, 부엌은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주인 박 씨는 2월부터 이 일대에서 무허가 식당을 옮겨 다니며 운영했지만 당국의 단속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가 나온 19일은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한 지 하루가 지난 시점입니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던 것 같습니다.
기사에서는 주변 환경을 “창녀촌 안“이라고 지적하며 사회적으로 불결한 공간이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도시락을 준비한 식당은 무허가 판잣집이었으며 부엌은 “더럽기 짝이 없다”는 등 원색적인 표현을 통해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이를 남일보듯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구경을 하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서울 용산경찰서였습니다.
경향신문 / 1970. 10. 20.
감사전보받고 한층더 분발키로
20일 오전 서울 용산경찰서에는 “넘치는 친절과 호의로 전원 무사 도착”이라는 전문이 도착했다. 이는 지난 17일 수학여행 도중 집단 식중독을 일으킨 연남국민학교 학생들을 용산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발견해 재빨리 남부시립병원으로 이송해 준 경찰의 조치에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 전문은 충남 연기군 남면 연남국민학교 교장이 보낸 것으로, 이에 용산서는 연남국민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앞으로 이 학교 어린이들의 서울 수학여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 『연남초등학교 100년사』(2012) >
(연남초등학교 소장)
이날의 사건에 대해 『연남국민학교 80년사』(1992)에서는 당시 인솔 교사였던 이영균님이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 … 여관 주인이 불량음식 두부를 제공하여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식중독이 걸려
용산역 광장에서 구토하고 정신이 없고
말도 못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전화로 용산경찰서에 연락한 바 경찰서장께서
선두지휘 호송차로 학생들을 각 병원에 입원 … ”
“ … 학교측과 학부형께서 상경하셨고,
못 가신 학부형님들께서는 학교 우체국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울에서 어떠한 상태인가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날 즉시 오교장과 이영찬 교감은 직위해직 되고,
2, 3일 치료받던 학생들은 무사히 귀교하였습니다. … ”
< 『연남초등학교 100년사』(2012) 中 >
(연남초등학교 소장)
세종시를 아카이빙하며 돌아다니다보면, 학교들 또한 중요한 기록들이 숨어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중 연남초등학교의 기록들을 살펴볼 때면 항상 용산경찰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자료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 용산경찰서일까 궁금했는데, 이로써 사건의 경위를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