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지나치던 아파트 입구의 조각상이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왔다. '태조 이성계와 버들잎 설화가 이 동네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인근에 세워진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평범하게만 여겼던 동네가 오랜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아름동 명품길 코스 안내판 (촬영: 2026.7.11)
그중 '어서각'이라는 지명이 눈에 띄었다. 이름의 유래와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서 어서각이 조선시대 역사와 연결된 장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며칠간 내리던 비가 그친 오후, 아름동 범지기마을 9단지 인근에 위치한 어서각을 방문했다. 어서각은 아파트 단지와 인접해 있으며, 현재 주변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어서각 표주박 조형물 (촬영: 2026.7.11)
어서각 입구에는 버들잎과 표주박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태조의 교지 내용도 함께 새겨져 있다. 이 조형물은 젊은 이성계가 용연('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뜻의 지명)에서 강순용의 여동생(훗날 신덕왕후)에게 버들잎을 띄운 표주박 물을 건네받은 뒤, 그녀의 지혜에 감탄하여 훗날 왕비로 맞이했다는 설화를 담고 있다.
어서각 전경 (촬영: 2026.7.11)
세종시 향토문화유산인 어서각(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1281)은 1743년(영조 19) 영조의 명으로 건립되었고 1984년에 개축되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태조의 친필 교지를 소중히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영조, 정조, 고종의 친필이 함께 봉안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전국에 여러 어서각이 있지만, 네 임금의 친필을 함께 봉안한 곳은 세종 어서각이 유일하며 그래서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2. 어서각 답사
어서각 안에는 무엇이 보관되어 있을까? 며칠 동안 여러 차례 찾았지만, 굳게 닫힌 어서각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마침내 양정봉 기록연구관님의 도움으로 임재한 문화해설사와 함께 어서각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해설사는 이곳이 예전에는 왕의 어필을 봉안한 신성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절을 올리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설명했다.
어서각 내부는 오랜 장마와 그날 아침 쏟아진 폭우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뽀송하고 쾌적했다. 오래된 목조건물임에도 곰팡이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어린시절 기와집에서 맡았던 은은한 나무향이 코끝을 스쳤다.
태조 교지 영인본 표구 (촬영: 2026.7.20)
어서각 안에는 태조의 교지 원본을 복제한 영인본을 표구하여 전시하고 있다. "강순용을 보국숭록대부로 특진시키고 재령백에 봉한다.“ 이 교지는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강순용(신덕왕후의 오빠)의 공적을 인정하여 태조가 내린 왕지(왕의 교지)이다. 강씨 후손들은 이 교지를 300여 년 동안 가문에 소중히 보관하다가 영조에게 바쳤고, 영조는 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어서각을 세웠다. 덕분에 이 귀중한 문화유산은 6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서각 내부 오른쪽 어서각기 (촬영: 2026. 7.20)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현재 어서각 내부에 어서각기 3점과 태조 어필 영인본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현재 어서각 내부에서는 어서각기 2점과 태조 어필 영인본만 확인할 수 있었다.
어서각 내부 왼쪽 어서각기 (촬영: 2026. 7. 20)
어서각 내부에 걸린 두 점의 어서각기는 오랜 세월 풍화와 퇴색으로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태조의 교지를 오늘날까지 지켜 온 신덕왕후 후손들의 헌신과 문화유산 보존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끼게 했다. 3. 어서각에 담긴 역사 이야기
어서각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과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가 어우러져 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기 전 사냥길에서 버들잎을 띄운 물을 건네며 급히 마시지 말라고 일러 준 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조선을 건국한 뒤 그녀를 왕비로 삼아 현비(顯妃)라 하였다(『태조실록』 태조 1년 8월 7일). 신덕왕후의 오빠인 강순용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로 특진되고 재령백(載寧伯)에 봉해졌다(태조의 교지 참조). 그러나 신덕왕후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태조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신덕왕후를 위해 현재의 덕수궁 인근에 정릉을 조성하고,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며 그녀를 추모했다.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를 신덕 왕후로, 능호를 정릉으로 헌의하다.(출처-태조실록10권, 태조 5년 9월 28일)
신덕왕후 정릉 (출처: 궁능유적본부)
태조는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당시 한양 도성 안, 현재의 덕수궁 인근에 조성. 태종은 정릉을 안암골로 이장, 오늘날에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함.
또한 사랑의 결실이었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권력 투쟁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의안대군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며, 태종의 이복 동생으로 이름은 방석이다. 아버지 이성계의 공훈으로 어린 나이에 고려 왕조에서 군기녹사(軍器綠事:군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직책)의 일을 맡았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 즉위 초에 세자 책봉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ㆍ조준ㆍ정도전 등에 의해 1392년 8월에 세자가 되었다. 이후 방원(뒤의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세자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여 일으킨 난) 때 피살되었다.(출처 : 국가유산포털) 버들잎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내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을 맞았다. 신덕왕후의 죽음과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말년을 깊은 슬픔으로 물들였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조선 건국사의 대표적인 비극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신덕왕후의 친정인 곡산 강씨 일부가 연기현(지금의 세종시 일대)으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은 훗날 태조의 어필을 이 지역에 봉안하게 된 배경이 되었고, 영조 때 이를 보존하기 위해 어서각이 세워지게 되었다.
4. 어서각에 봉안된 네 분 왕의 어필 어서각에는 네 분 왕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다. 어서각(御書閣)은 조선의 태조(太祖)[1335~1408], 영조(英祖)[1724~1776], 정조(正祖)[1752~1800], 고종(高宗)[1852~1919]이 직접 쓴 글씨를 모신 서각(書閣)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진본 태조 교지 (출처: 동아일보 2021-05-26)
위 사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태조의 교지 원본이다. 조선 개국공신 강순용에게 보국숭록대부와 재령백의 작위를 내린 왕지(왕의 교지)로, 사진은 동아일보에 실린 원본을 인용하였다. 아래 소개하는 영조·정조·고종의 어필은 규장각 소장 자료로 소개된 내용을 참고하였으나, 동일한 원본의 소장 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참고자료로만 활용하였다.(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康東信의 집」(원출처 미확인))
영조대왕 친필 (규장각 보관) (출처:네이버 블로그 「康東信의 집」)
조선의 영조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쓴 교지(문서)를 전해 받은 뒤, 그 문서의 역사적 가치와 감회를 담아 뒤쪽에 보태어 쓰는 글인 발문(跋文)을 작성했습니다. 즉, "이 귀한 태조대왕의 친필 교지가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왔고,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영조가 직접 문서 끝에 적어 넣은 것을 말합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정조대왕 친필 (규장각 보관) (출처:네이버 블로그 「康東信의 집」)
정조의 친필은 신덕왕후 출생지에 세운 비석에 쓰여졌다. 성스러운 왕비의 옛 터라는 뜻의 ‘聖后私第舊基(성후사제구기)’라는 비명을 직접 쓰고, ‘御製 象山府 神德王后私第舊基碑(어제 상산부 신덕왕후사제구기비)’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를 적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종황제친필 (규장각 보관) (출처:네이버 블로그 「康東信의 집」)
고종의 친필은 1846년(헌종 12)에 어서각이 건립된 후 고종이 사적(事跡)을 직접 써서 보낸 것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5. 어서각의 비석과 비문
어서각 입구 두 개의 비석 (촬영: 2026.7.20.)
어서각 입구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어서각 '태조 교지' 비석 (촬영: 2026.7.11)
태조대왕 친필 비석에는 태조가 개국공신 강순용에게 내린 왕지의 내용이 새겨져있다.
경내 비석 왼쪽 면-정조대왕 친필 (촬영: 2026.7.16.)
이 비석의 왼쪽 면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라는 비문이 적혀있다.
경내 비석 오른쪽 면-고종 친필 (촬영: 2026.7.16.)
이 비석 오른쪽 면에는 고종이 어서각의 유래와 내력을 기록한 사적(事跡)을 친필로 써 내려 보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경내 비석 뒷면-영조 대왕 친필 (촬영: 2026.7.16.)
비석 뒷면에는 영조 대왕의 친필 발문이 새겨져 있다. 다만 비석이 벽면과 거의 맞닿아 있어 촬영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어서각 경내 비석 (촬영: 2026.7.15.)
어서각 경내에 세워진 또 하나의 비석은 조선 태조의 어필이 이곳에 전해진 내력과 어서각을 세우게 된 배경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경내 비석 왼쪽면-영조의 친필 (촬영: 2026.7.16.)
이 비석의 왼쪽 면에는 영조의 친필인 「개기사직비궁시(開基社稷匪躬詩)」를 어서각에 봉안하여 보존하고 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개기사직비궁시'는 나라를 세운 공과 나라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충정을 기리는 뜻을 담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 비석 뒷면-어서각 중수 명단 (촬영: 2026.7.16.)
이 비석의 뒷면에는 '서기 1994년 갑술년 가을 건립'이라는 기록과 함께 어서각 중수에 참여한 임원 및 공로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6. 어서각의 현판과 어서각기
어서각 전경 (촬영: 2026.7.11)
현장 안내판은 어서각의 편액(현판)은 영조가 친필을 내렸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여러 공신력 있는 자료와 문헌을 찾아보았음에도 이를 명시적으로 밝힌 기록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다. 편액의 출처와 전래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 문헌과 사료를 통한 보다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대청마루 전면을 찍은 사진 (촬영: 2026.7.16.)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에서 궁서체나 명조체 같은 글꼴을 손쉽게 선택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왕실과 선비들에게 글씨는 단순한 기록 수단이 아니었다. 글씨는 글자를 쓰는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과 품격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대청마루 정면에 있는 '어서각기' 현판 (촬영: 2026.7.16)
어서각 대청마루 정면에는 '어서각기 (御書閣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글은 조선 고종의 친필로 전해지며, 어서각이 세워지게 된 유래와 역사적 의미를 기록한 기문이다.
대청마루 오른쪽에 걸린 '어서각기' 현판 (촬영: 2026.7.16.)
대청마루 오른쪽에 걸린 「어서각기(御書閣記)」 현판은 고종이 지은 「어서각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후대에 제작된 서예 현판이다.
대청마루 왼쪽에 걸린 '어서각중수기' 현판 (촬영: 2026.7.16.)
대청마루 왼쪽에 걸린 '어서각중수기(御書閣重修記)' 에는 태조의 어필이 어서각에 봉안된 역사와 어서각을 보수하며 문화유산을 후대에 전하려는 뜻이 담겨있다.
어서각 대청마루 전경(촬영: 2026.7.16)
지금까지 어서각의 내부와 외부를 둘러보며 비석과 비문, 대청마루의 현판 등 역사적 유산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어서각 자체가 지닌 건축적 특징과 그 아름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 7. 어서각의 건축적 특징
양정봉 기록연구관님과 함께 임재한 문화해설사를 만나 어서각에 대한 여러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이곳에 보관된 왕지(王旨)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정삼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내리는 왕지는 국왕이 직접 써주는 경우가 있었으며, 강순용은 정일품 관원이었고, 신덕왕후의 오빠였기 때문에 태조가 친필로 왕지를 내렸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솟을삼문 (촬영: 2026. 7. 20)
이어 문화해설사는 어서각의 솟을삼문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솟을삼문은 가운데 문을 좌우의 문보다 한 단 높게 세운 세 칸 형식의 대문으로,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 격식 있는 건축물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세 개의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예법과 질서를 상징한다.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에 따라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서쪽 문으로 나왔으며, 가운데 문은 왕과 신위(神位), 그리고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만 드나들 수 있는 신성한 통로였다.
솟을삼문-가운데 문 (촬영: 2026. 7. 11)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솟을삼문의 가운데 문이 높은 것은 높은 관모를 쓰거나 말을 타고, 또는 가마를 탄 채 출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신분에 따른 예법과 위계를 건축에 반영한 것이다.
홍살문 (촬영: 2026.,7.20)
홍살문은 속된 공간과 신성한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문이다.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이 문을 지나면서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어서각 둥근 기둥 (촬영: 2026.7.20.)
문화해설사는 어서각의 둥근 기둥에 담긴 의미도 설명해 주었다. 둥근 기둥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하늘은 임금을, 땅은 백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상징성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함부로 둥근 기둥을 사용하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넘보는 행위로 여겨져 역모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촬영: 2026. 7. 20)
기둥 아래의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돌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는 대신 각각의 자연석에 맞추어 기둥을 세우는 전통 공법을 적용했는데, 이는 지반의 움직임이나 자연재해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선조들의 건축 지혜라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
어서각 단청 (촬영: 2026. 7. 20)
단청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물의 신성함과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네 개의 꽃잎처럼 보이는 문양은 감꼭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부귀와 다산을 뜻하며, 그 주변의 하얀 점 일곱 개는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를 표현한 것이라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
어서각 기단 (촬영: 2026. 7. 20)
건물을 높게 받친 기단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며, 일반 공간과 구별되는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낸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
8. 어서각의 문화적·건축사적 의미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어서각 대문 (촬영: 2026.7.15.)
이 건물은 단순한 한옥이 아니다. 현판과 어서각기, 그리고 비석을 통해 건립 배경과 중수 과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지역 공동체가 왕실의 유산을 오랜 세월 지켜 온 역사를 보여 주는 중요한 건축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앞에서 바라본 어서각 (촬영: 2026.7.15.)
따라서 어서각은 조선 후기의 유교적 가치관과 지방 사회의 문화유산 보존 의식이 담긴 공간이자, 팔작지붕과 겹처마를 비롯한 전통 한옥의 아름다운 건축미와 공간 구성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향토 건축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버들잎 상징 앞뜰의 정원 (촬영: 2026.7.15.)
버들잎 형상 정원은 단순한 조경 공간이 아니다. 표주박에 버들잎 한 잎을 띄워 물을 건네던 신덕왕후의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어서각 부조 벽화 (촬영: 2026.7.11)
은행나무 보호수 (촬영: 2026.7.11)
어서각 안뜰에는 수령 210년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이 나무는 우듬지는 잘려 나갔지만 곧게 뻗은 곁가지들은 여전히 튼실했고, 장마에 떨어진 익지 않은 은행열매가 곳곳에 많이 흩어져 있었다.
어서각 회화나무 (촬영: 2026., 7. 20)
또한 어서각 경내에는 '학자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예부터 회화나무는 학문과 출세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져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 격식 있는 공간에 자주 심어졌다.
범지기마을 9단지와 담장 없이 연결된 통로 (촬영: 2026.7.11.)
이 지역 출신인 문화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어서각은 예전에는 동네 야산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주민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오늘날 이곳 주민들은 조선 시대에는 감히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왕의 친필과 소중한 역사 문화유산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며 살아간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삶을 결정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누구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서각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에서, 모든 시민이 함께 향유하는 문화유산으로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뒷담에서 바라본 어서각 (촬영: 2026.7.15.)
장마가 끝난 뒤 찾아간 어서각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계절의 흔적이기도 했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인 만큼 조금 더 세심한 관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서각 현장 안내판 (촬영: 2026. 7. 11)
어서각 현장 안내판에는 어서각 안에 태조의 교지와 세조·영조·고종의 어필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과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세조'는 '정조'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유산 안내의 정확성을 위해 안내판이 수정되기를 바란다.
정원에서 바라본 어서각 전경 (촬영: 2026. 7. 20)
어서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산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곁의 문화유산이다. 목조 건축물과 보호수가 꾸준히 보존되고 관리되어, 이곳이 다음 세대에도 역사와 쉼을 함께 전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오래 남기를 기대해 본다.
네이버 지도 캡처
지역문화기록가라는 역할은 오늘, 내 동네의 문화유산에 무심했던 나를 어서각으로 이끌었다. 늘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 번도 깊이 바라보지 않았던 공간. 그곳에서 지역문화기록가는 마을의 시간과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역사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역사는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매일 걷는 아름동의 길목에도 왕의 숨결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숨결은 오늘도 어서각에서 조용히 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