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의 조선시대 여성문인, 곽청창(남편 김철근 묘지명, 청창행장유사)
[글 / 시민기록가 윤철원] 서원(청주)곽씨 청창(晴窓)은 조선 후기 여성문학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여 성해응의 「연경재전집」, 황윤석의 「이재난고」, 이재의 「도암집」, 장지연의 「대동시선, 일사유사」 등에 그녀의 행적이나 시(詩) 등이 실려 있다. 그녀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편 김철근이 별세하자 지은 「성균진사 김공묘지병 병서」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남편 사후에 행장 또는 제문을 지은 사례는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남편의 묘지명을 쓴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며 찾아보기 힘들다. 그동안 정동유가 지은 주영편에 곽청창이 지은 묘지명 전문이 실려 있었으나, 묘지석 실물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곽청창의 8대손 김석수(천안시 거주)가 「묘지석」 실물과 곽청창의 일대기를 담은 「청창행장유사」를 보관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곽청창은 1683년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으며, 김철근에게 출가한 후 서울에서 살다가 1721년 남편을 따라 전의면 관정리로 낙향하여 1761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40여 년을 전의에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1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2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 한글 해석문] 곽청창이 지은 남편 김철근의 묘지명 成均館 進士 節友堂 金公 墓誌銘 幷序 公姓金諱鐵根字石心號節友堂系出光山生於戊午閏三月初五日幼而聰慧八世能成詩洛下之士莫不豓稱且事父母至孝己亥中生員辛丑抗疏明君臣之大義卒於戊申十月初四日葬於全義縣北高道朴壬坐之原初娶參議韓山李禎翊之女後娶王子師傅西原郭始徵之女卽未亡人二男一女長得性次得運出後叔父璞根一女未笄皆未亡人出也未亡人泣而叙事哀不能文嗚呼有有而有其有有有而不克有其有有而有其有常也有而不克有其有變也季世何常之常少而變之常多也公於國植綱常之節於家正百行之源而根於天性則公之有其質也待宗族以睦敎子弟以義親疎咸得其歡心鄕黨罔或有訾謫則公之有其德也有其質有其德則宜乎有是壽有是位而年僅逾五十位不得一命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是固不可測者而重爲公痛惜者也銘曰出可以樹功名處可以垂風聲而卒不彰奈何乎彼蒼 崇禎後己酉七月九日 未亡人 西原郭氏 泣血敬誌 成均館 進士 節友堂 金公 墓誌銘 幷序 (195+170=365字) 성균관 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公 姓金 諱鐵根 字石心 號節友堂 系出光山 공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철근(鐵根), 자는 석심(石心), 호는 절우당(節友堂)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입니다. 生於戊午閏三月初五日 幼而聰慧 八世能成詩 洛下之士 莫不豓稱 且事父母至孝 무오년(1678년) 윤3월 5일에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한양(낙하)의 선비들이 아름답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한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습니다. 己亥中生員 辛丑抗疏 明君臣之大義 卒於戊申十月初四日 葬於全義縣北 高道朴 壬坐之原 기해년(17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신축년(1721년)에 상소를 올려 군신 간의 큰 의리를 밝히셨으나 무신년(1728년) 10월 4일에 돌아가시니, 전의현 북쪽 고도박 임좌(북북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습니다. 初娶 參議韓山李禎翊之女 後娶 王子師傅西原郭始徵之女 卽未亡人 첫째 부인은 참의를 지낸 한산 이씨 이정익의 딸이고, 후처는 왕자사부를 지낸 서원인(청주인) 곽시징의 딸이니 곧 미망인(본인)입니다. 二男一女 長得性 次得運 出後叔父璞根 一女未笄 皆未亡人出也 未亡人 泣而叙事哀不能文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득성(得性)입니다. 차남은 득운(得運)으로 숙부 박근(璞根)의 뒤를 이었습니다. 딸 하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며 모두 미망인의 소생입니다. 미망인이 울며 사실을 서술하려 하나 슬퍼서 능히 글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嗚呼 有有而有其有 有有而不克有其有 오호라! 가진 것이 있으면 그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인데, 가진 것이 있어도 그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有而有其有常也 有而不克有其有變也 가진 것이 있어서 그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을 상(常, 평범한 이치)이라 한다면, 가졌으나 그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변(變,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합니다. 季世 何常之常少 而變之常多也 말세에 왜 평범한 이치는 항상 적고, 변고는 항상 많은 것입니까? 公於國植綱常之節 於家正百行之源 而根於天性 則公之有其質也 공께서는 나라를 위해 강상(綱常)의 절개를 세우셨고, 집안에서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바로잡으셨으며, 천성에 뿌리를 두었으니 공은 그 바탕(質)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待宗族以睦 敎子弟以義 親疎咸得其歡心 鄕黨罔或有訾謫 則公之有其德也 종족에게는 화목으로 대하고 자제에게는 의를 가르치니, 친소 관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향당(고을)에 혹여라도 비방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은 공이 그러한 덕(德)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有其質有其德 則宜乎有是壽 有是位 이러한 바탕(質)이 있고 덕(德)이 있으면 마땅히 그에 걸맞은 장수와 지위를 누리려야 하거늘 而年僅逾五十位不得一命 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 공의 나이 겨우 쉰을 넘겼고, 관직 하나 얻지 못하셨으니, 이야말로 가진 것(바탕과 덕망)이 있어도 누리지 못한 것 아닙니까? 是固不可測者 而重爲公痛惜者也 이것이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니, 거듭 공이 애석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銘曰 새겨 가로되 出可以樹功名 세상에 나아가 공명(功名)을 세울 만하고 處可以垂風聲 물러나 머물면 풍성(風聲, 교화의 명성)이 드리울 만하건만 而卒不彰 끝내 떨치지 못하였으니 奈何乎彼蒼 어찌하리오. 저 푸른 하늘이여! 崇禎後己酉七月九日 未亡人 西原郭氏 泣血敬誌 숭정후 기유년(1729년) 7월 9일, 미망인 서원 곽씨는 피눈물로 공경히 묘지명을 씁니다. < 청창행장유사 사진 1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2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3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4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5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6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7 - 절우당유사>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청창행장유사 - 한글해석본] - 곽청창이 75세에도 전의에서 거주하였으며 79세(1761년)에 별세하였음을 알수 있음. 西原郭孺人 行狀 吾先君子論賢婦人 亟稱孺人郭氏曰女士女士 吾立側請曰何人也 先君子曰氏出西原今 上殿下王子時 師傅 始徵女 嫁爲生員金公鐵根後配 金公與余同 爲打愚先生外孫 且孺人嘗乳我是以知之 特詳 其敬姜曺大家之流歟 又請曰 然則能文 先君子曰 文而論孺人乎哉 서원곽유인 행장 우리 선군자(先君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현명한 부인을 논하실 때마다 곽씨 부인을 ‘여사(女士), 여사’라며 거듭 칭찬하셨다. 내가 옆에 서서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여쭈니, 선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곽씨의 본관은 서원(청주)이다. 지금 임금(영조)께서 왕자 시절 사부(師傅, 스승)를 지낸 시징의 딸이다. 생원(生員) 김철근(金鐵根)에게 둘째 부인(後配)으로 출가하였다.’라고 하셨다. 김공은 나와 함께 타우선생(打愚先生)의 외손이다. 또한 유인(곽부인)은 일찍이 나에게 젖을 먹여 주셨기에 그분을 특히 잘 아는 것이다. 그분은 강씨나 조씨 가문의 훌륭한 여류문사와 같이 존경할 인물이다. 다시 “그러면 글(문장)에도 능하셨습니까?”라고 여쭈니, 선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문장으로만 그 유인을 논하겠느냐?' (글재주뿐만 아니라 덕행이 훌륭하다는 의미). 婦人業精 或以一藝名 而孺人之孔子顔子孟氏之學 體之心行之身者也 孝舅姑順夫子嚴子弟寬婢僕一遵禮儀法度森然 明於毛詩善講說 讀史論事 不論其人 論心 不論其事 爲文辭出自己 無一言蹈襲前人 嘗著四書疑問 命其子若自爲 而質陶庵先生 先生曰 見識高非吾輩可對白而還 其造詣精深如此 然善鞱晦常居若無能也 부인(婦人)의 업이 정밀하면 간혹 한 가지 재능으로 이름이 나기도 하지만, 유인(孺人)은 공자·안자·맹자의 학문을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행하였다.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치고 비복(노비)들을 너그럽게 대함에 있어, 한결같이 예의와 법도를 준수하여 엄숙하였다. 『모시(毛詩)』에 밝아 강설을 잘하셨고, 역사를 읽고 시사(時事)를 논할 때는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그 마음(본심)을 논하고, 그 일의 결과보다 그 일의 근원(동기)을 논하셨다. 문장을 지을 때는 자기에게서 우러나온 것을 써서 한 마디도 앞선 사람의 것을 답습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사서의문(四書疑問)』을 저술하고 아들에게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도암(陶庵) 선생(이재)에게 질문하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견식이 높아 우리 같은 무리가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돌려보냈다. 그 조예가 정밀하고 깊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늘 자신을 잘 감추어(韬晦) 평상시에는 마치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거처하였다. 新婦時姑試授舊牘塞戶缺孺人倒字糊以是人無知者有詩曰 海水連天濶 山花待雨開 其天機流活 然七歲作詩何足稱焉 신부 시절에 시어머니가 시험 삼아 옛 서류 뭉치를 주며 문구멍의 해진 곳을 바르라고 하셨다. 부인은 (글을 아는 것이 드러날까 봐) 일부러 글자를 거꾸로 뒤집어 발라 이로써 사람들이 (그녀가 글을 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바닷물은 하늘에 이어져 넓고, 산꽃은 비를 기다려 피어나네." 라고 하였으니, 그 타고난 재치(천기)가 살아 움직였다. 그러나 7세에 시를 지은 것만 가지고 어찌 칭찬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겠는가. 乃出孺人所爲金公墓誌命讀之其文曰 嗚呼 有有而有其有 有有而不克有其有 有而有其有常也 有而不克有其有變也 季世何常之常少 而變之常多也 公於 國植綱常之節 家正百行之源 而根於天性 則公之有其質也 對宗族而敦睦 敎子弟而義 親疏咸得其歡心 鄕黨罔或有訾謫 則公之有其德也 有其質有其德則宜乎有是壽有是位 而年菫有五十 位不得一命 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 銘曰 出可以樹功名 處可以垂風聲 而卒不彰 奈何乎彼蒼 이에 부인이 지은 김공(남편 김철근)의 묘지명을 내어 읽어보니 그 문장에 이르기를, "아아! 있어야 할 것이 있어 그 있는 것을 누리는 이가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있음에도 그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 누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常)이나,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변고(變)이다. 말세에는 어찌 정상적인 일은 이리도 적고, 비정상적인 변고는 이리도 많은가! 공은 나라를 위해 강상의 절개를 세웠고, 집안에서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바로잡았으니 이는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것이 공이 가진 '바탕(質)'이다. 일가친척에게 화목하고 자제들을 의로써 가르쳐 친소 관계를 막론하고 모두의 마음을 얻었으며, 고을 사람들 중 누구도 헐뜯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공이 가진 '덕(德)'이다. 바탕도 있고 덕도 있었으니 마땅히 장수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어야 하거늘, 나이는 겨우 쉰에 머물고 벼슬은 한 번의 명조차 얻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있음에도 그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나아가서는 공명을 세울 수 있었고, 머물러서는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나, 끝내 드러나지 못했으니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하랴!" 하였다. 吾心異識之丁丑 隨先君子南下道 出全義先君子拜于孺人 吾亦從而拜時孺人已七十五歲 猶斂膝危坐肩背聳竦燁 然有精神 壁間有四書朱子書而已 談天人性命 纚纚若不可窮 先君子出而歎曰 孺人經術益高 後四年辛巳十一月十二日壽七十九而卒 祔葬于其縣德坪負癸之原 내 마음속에 남달리 기억되는 정축년(1757년), 돌아가신 아버님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에 전의(全義)를 지나게 되었는데, 아버님께서 부인을 배알하셨다. 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절을 올렸는데, 당시 부인의 연세는 이미 75세이었다. 그런데도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곧게 앉아 계셨는데, 어깨와 등의 기세가 꼿꼿하고 정신이 형형하게 살아있었다. 벽 사이에는 오직 사서(四書)와 주자의 책들뿐이었다. 천성과 인명(人性命)에 대해 담론하시는데 그 말씀이 끊이지 않아 끝이 없을 듯하였다. 아버님께서 나오시며 감탄하시기를 “부인의 경술(經術, 유교 경전에 대한 조예)이 더욱 높아지셨구나!” 하셨다. 4년 뒤인 신사년(1761년) 11월 12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그 현(전의현) 덕평의 계좌(癸坐, 북북동향) 언덕에 (남편과) 합장하였다. 四五歲在師傅公膝上 能屬詩 尤庵先生見而奇之 命號曰晴窓 孺人之祖之欽執義 外祖靑松沈益亨 有著述可傳於後累十篇君子謂當與 女戒七篇 相表裡 生二男一女 長曰 得性 次曰得運 女適朴光冑 得運 生三男 和恊和禎和振 和禎出爲得性後 諸孫錄 孺人行謁先君子忕諾 而文不就仍以屬余 誼不敢辭謹撰次其耳聞目覩如此 盖欲徵信於立言君子也 (부인은) 4~5세 때 스승인 할아버지(사부공)의 무릎 위에서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청창(晴窓)’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부인의 할아버지는 집의(執義)를 지낸 곽지흠이며, 외할아버지는 청송 심익형이다. 후세에 전할 만한 저술이 수십 편에 달하니, 군자들은 마땅히 반소가 지은 《여계(女戒)》 7편과 서로 안팎을 이룰 만하다고 평가한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맏이는 득성이고 둘째는 득운이며, 딸은 박광주에게 시집갔다. 득운이 세 아들 화협, 화정, 화진을 낳았는데 화정이 득성의 양자로 들어갔다. 손자들이 부인의 행장(일대기)을 기록하여 나의 선친(이만성)께 묘지명을 청하고 승낙을 받았으나, 글이 완성되지 못한 채 (선친이 돌아가셔서) 나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 없어, 내가 직접 듣고 본 바를 이와 같이 삼가 엮어 쓴다. 이는 장차 글을 세우는(평가하는) 군자들에게 믿음을 얻고자 함이다. 遺事 孺人常語子性曰 汝前母之葬歲久似難動合祔於汝父親墓所 我死後汝等如欲合窆則情禮不可又須各葬於近處也 孺人長子得性平生好禮 得性不幸臨死索筆書曰老親安心 孺人正色曰死生有命吾心則安汝須安心而歸雖於倉遑號哭之際 必勑曰渠嘗好禮須一從家禮 愼毋紊亂也 유사 부인이 평소 아들 득성(得性)에게 말하기를, "네 전모(김철근의 첫 부인)의 묘소는 장사 지낸 지 오래되어 옮기기 어려우니, 네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하도록 하여라.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이 만약 (나까지) 합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정(情)과 예(禮)에 어긋나는 일이니, 마땅히 각각 근처에 따로 장사 지내야 한다." 하였다. 부인의 맏아들 득성은 평생 예법을 좋아했다. 득성이 불행히 죽음에 임박했을 때 붓을 찾아 쓰기를, "늙으신 어머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삶과 죽음에는 명(命)이 있으니 내 마음은 편안하다. 너 또한 마땅히 마음을 편히 하고 돌아가거라." 하였다. 비록 황망하게 울부짖으며 통곡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부인은 반드시 명하기를, "저 아이(득성)가 평소 예법을 좋아했으니, 반드시 《가례(家禮)》를 일체 따르고 삼가 어지럽히지 말라." 하였다. 孺人所著述先世一家墓文郭師傅遺經書箚疑女子戒訓等文甚富 一日盡焚之曰此非婦女事 恐兒輩不知宣泄於他人也 부인이 저술한 바는 선세일가 묘문, 곽사부유경서차의, 여자계훈 등 글이 매우 방대했다. 어느 날 이를 모두 불태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부녀자가 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혹여 알지 못하고 타인에게 퍼뜨릴까 두렵다." 하였다. 節友堂遺事 嘗有節日制 先聲公將觀光 其時主文人 適來見公試紙曰 吾當爲子裁之割皮封太 翌日 果有試士之命 公棄其紙不用曰 吾知其意 焉縱得第 心能安乎 尹進士志述 方就刑 公出路左握手 訣別曰 子其善歸 吾亦從此逝矣 翌日再次抗疏 明君臣之大義 절우당 유사 일찍이 절일제(節日制, 명절에 치르는 특별 과거 시험)가 있었을 때, 선성공(先聲公, 절우당)께서 장차 과거를 보러 가려 하셨다.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자가 마침 공을 찾아와 시험지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이것을 마름질(표시)해 주겠소.” 하며, 종이 겉면을 찢어 콩을 넣어 봉하였다. 과연 다음 날, 선비를 시험하라는 명(과거 실시 명령)이 있었다. 공께서는 그 시험지를 버리고 사용하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의도(부정행위)를 아노니, 설령 이렇게 해서 급제한들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셨다. 후에 윤진사 지술(尹志述)이 막 형벌을 받으러 갈 때, 공이 길 왼쪽으로 나가 그의 손을 잡고 작별하며 말하기를, “자네는 부디 잘 가게. 나 또한 이제부터 (그대의 뒤를 따라) 떠날 것이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다시 상소를 올려 군신(君臣) 사이의 큰 의리를 밝혔다. < 생원김공 묘표 1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도암선생집 권39) < 생원김공 묘표 2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도암선생집 권39) [생원김공 묘표 - 한글 해석문] - 김철근과 곽청창의 가족이 1721년 전의현으로 낙향하였음을 알 수 있음. 陶菴先生集卷三十九 / 墓表[二] 도암선생집권삼십구 / 묘표 生員金公墓表 (생원김공묘표) 嗚呼。此金公鐵根石心之藏也。石心先余二年戊午生。生而聰穎。八歲能詩。吾祖考議政公於公爲外從大父。嘗呼公使余同賦卽景。公應聲而對。有梨花風 a195_320c來滿院香之句。議政公歎其絶調。顧謂縡曰汝不及也。由是才名藉甚。 오호라! 이곳은 김철근(자: 석심) 공의 묘소이다. 석심은 나보다 2년 먼저인 무오년(1678년)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여덟 살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나의 조부이신 의정공께서는 공에게 외종조부가 되시는데, 일찍이 공과 나를 불러 즉흥시를 짓게 하셨다.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배꽃 바람 불어오니 온 마당에 향기 가득하네(梨花風來滿院香)"라고 하니, 의정공께서 그 절묘한 가락에 감탄하며 나(도암 이재)를 돌아보고 말씀하시길 "네가 미치지 못하겠구나" 하셨다. 이로부터 재주와 명성이 자자했다. 晩中己亥司馬。辛丑倡率館學儒生。上疏討逆臣柳鳳輝之罪。盡室歸全義之楓溪。全義卽公外祖打愚先生卜築之地。而公考主簿公諱恒壽寓居者也。 늦게 기해년(171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신축년(1721년)에는 관학(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역신 유봉휘의 죄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이후 온 가족을 데리고 전의(全義)의 풍계(楓溪, 현 관정리)로 돌아갔다. 전의는 공의 외조부인 타우 선생이 터를 잡은 곳이자 공의 부친인 주부공(휘 항수)께서 우거하시던 곳이다. ※ 유봉휘는 연잉군(영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인물임 ※ 신임사화(1721∼1722,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노론이 밀려날 때 낙향한 것임 公旣還舊廬。斷置世事。惟以書史自娛。酷愛松竹菊。扁其堂曰節友。以寓歲寒之意。吾仲父歸樂公竄扶安。公匹馬往問。仍徧遊邊山而歸。戊申十月四日感疾卒。 공은 옛집으로 돌아온 뒤 세상일을 끊고 오직 서책을 보며 스스로 즐거웠다.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몹시 사랑하여 집의 이름을 '절우(節友)'라 하였으니,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는 절개의 뜻을 담은 것이다. 나의 숙부 귀락공(李晩成)께서 부안으로 유배되셨을 때(1722년), 공은 말 한 필을 타고 찾아가 문안하고 변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무신년(1728년) 10월 4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金出光州。高麗忠臣直提學若時之後。公凡再娶。參議韓山李禎翊女無育。西原郭氏。其父王子師傅始徵。有女士譽。二男一女。長得性。次得運出爲季父後。士人朴光宙壻也。 본관은 광산으로, 고려 충신 직제학 김약시의 후손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첫 부인 한산 이씨는 자식이 없었고, 두 번째 부인 서원 곽씨는 여사(女士)의 명예가 있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득성이고, 차남 득운은 막내 숙부의 뒤를 이었으며, 사위는 박광주이다. 公天資仁孝。事親無違志。信義素孚於朋友。詬詈不及於奴僕。與人處。襟懷坦蕩。不設畦畛。喜道人之善。恥言人之過。爲文多積博發。下筆立數千言。 공은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신의가 두터웠고 종들에게도 꾸짖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탁 트여 경계가 없었으며, 남의 착한 점 말하기를 좋아하고 허물 말하기를 부끄러워했다. 글을 지을 때는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붓을 들면 단숨에 수천 마디를 써 내려갔다. 性嗜酒。遇輒引滿。遺命祭用一大椀。不問家人産業。間多絶爨而逌然也。人勸之仕則曰吾非掉頭於祿仕。士子持己如處子。但不可自求耳。 성품이 술을 즐겨 사람을 만나면 가득 들이켰으며, 제사 때는 큰 사발을 쓰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집안 살림에는 관심이 없어 때로 끼니가 끊길 정도였으나 유유자적하였다. 벼슬을 권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벼슬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비가 몸가짐을 처녀처럼 정숙히 할 뿐 스스로 구해서는 안 될 뿐이다"라고 답했다. 公爲人忼慨。最嚴於陰陽淑慝之分。語及時事。指斥無所顧忌。或至流涕。杜少陵詩不及見淸時嗚呼就窀穸者。正道公心事也。得性來乞文。略叙此而歸之。使刻于石。 공은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옳고 그름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 시국 정치를 논할 때는 거리낌 없이 비판하였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두보의 시에 '태평성대를 보지 못하고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공의 심사(心事)를 바르게 대변하는 것이다. 아들 득성이 찾아와 글을 청하기에, 이를 간략히 적어 돌려보내어 돌에 새기게 한다. < 김철근, 곽청창 부부의 8대손(김석수), 전의 광산김씨 문중인사 등과 함께 만남 > (촬영 : 2026. 3. 23.) --- [참고문헌] (1) 구술인터뷰 ○ 대상 : 김종식(천안향토문화연구회장) / 2026. 3. 11 / 천안시 병천면 옛날 순두부 식당 - 천안향토연구 제11집에 곽청창에 대한 연구내용을 게재하게 된 동기 청취 - 곽청창이 지은 남편 묘지명 및 청창행장유사 사진 원본(김종식 촬영) 파일을 받음. - 곽청창의 후손과 만남을 주선하기로 약속 ○ 대상 : 김석수(김철근·곽청창 부부의 8대손) / 2026. 3. 23 / 천안시 구성동 구성식당 - 묘지명 및 청창행장유사를 보관하게 된 사연 – 선대로부터 대를 이어 보존하였음. - 동참자 : 7명(후손 김석수, 천안향토사 김종식, 광산김씨문중 2명, 세종향토사 윤철원 등 3명) (2) 개인 소장 사진 - 김종식(2014년) 곽청창이 지은 남편 김철근의 묘지석(청화백자 2쪽) ⇒ 전체 글자 판독이 가능함. - 청창행장유사 : 곽청창의 생애가 기록된 행장과 유사(앞뒤 표지 포함 10쪽) (3) 작성자 직접 촬영사진 (윤철원) - (2026. 3. 23) 곽청창이 살았던 관정리(사관정) - (2026. 3. 23) 곽청장의 직계 8대손 및 전의 광산김씨 문중인사와 함께 만남(천안 구성식당) (4) 지역신문 기사 - 기획 (2025. 12. 25) 문희순의 충청女지도, 대전일보 https://www.daejonilbo.com/ - 조한필 (2024. 12. 08) [조한필의 視線] 조선시대 천안의 두 여성문인, 곽청창·김부용 https://www.kukinews.com/ (5) 향토사, 지역단행본 - 책명 세종문화, 글쓴이 송길룡 「세종여성 인물사, 곽청창 편」, 세종문화원(2025) - 책명 천안향토연구, 글쓴이 김종식 「목천출신 여류문인 , 곽청창」, 천안시동남구문화원(2024) - 책명 주영편, 정동유(옮긴이 안대회 외) 「곽씨부인의 남편 묘지명」, ㈜휴머니스트출판그룹(2016) (6) 학술논문 - 문희순 (2012), 호서지역 사대부가의 여성교육과 여성문인의 배출, 충남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인문학연구 · vol. 88 · 39-70 (7) 웹자료 - 한국고전종합DB, (1803) 도암선생집 권39(생원 김공 묘표) https://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