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록문화관 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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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종 이야기

총탄이 아닌 기록의 흔적을 남긴 육철식 이야기
6월 6일, 현충일은 전쟁에 참여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총탄에 쓰러지지는 않았더라도, 전쟁과 분단의 과정에서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요?   < 『빨치산(1988)』 표지 > 표지는 육철식이 북으로 넘어가 제3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재학할 당시 육철식(필명 이영식)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1932년, 동면에서 태어나 부강면으로 이사한 뒤 부강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중학교를 다닐 때도 청주로 나가 도청에 사환(자잘한 심부름 등을 하던 사무보조)으로 근무하며 야간 중학교를 다녔으나, 그 무렵 ‘못 사는 사람들도 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사회주의에 매료되어 그만두고 북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평양은 무상 교육, 토지개혁, 청년 조직화 등으로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이념적 신세계’처럼 비쳤습니다. 1988년 출간한 그의 저서 『빨치산』에서도 이 당시를 회상하며 광복의 기쁨보다는 못 사는 것에 대한 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강동정치학원(1998)』 표지 > 『빨치산(1988)』의 내용을 수정하여 출간한 증보판 당시 북한에서는 ‘강동정치학원’이 만들어져 사상과 군사교육이 시행되었고, 그 뒤 인민군 통신병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탄이 발사되지 않아 생존하게 됩니다. 이후 대한민국 체제에 전향하고, 생계를 위해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육군본부에서 심리전을 지원하며 귀순권고장을 발행하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 육철식 선생 - 김영자 여사 결혼사진 > (출처 : 임비호, 2025.4.12.) 복무를 마치고는 다시 고향 부강면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학교 중퇴라는 학력과 빨치산 전력은 고향사람들과 지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일부 주민들은 그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인쇄물을 돌리고, 경찰서에 진정을 넣기도 하는 등 마찰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강면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서울신문사 지국을 내 신문을 돌리거나 한국전력의 전기요금수납 위탁업무를 맡아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그렇게 그는 묵묵히 마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갔습니다. 다음은 육철식 선생님의 부인 김영자 여사님의 인터뷰로, 부강면에서 어떻게 생활을 이어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있는 나를 끌고 다방 주방으로 가면서 이곳에 있으라고 하더라구.” … (중략) … “처음에는 집안 살림만 했던 사람이라 주방 일을 잘 몰랐는데 좀 해 보니 할 만하더라구. 장사도 잘되었어….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하면 다른 건물로 가서 다시 하고, 이후에는 건물을 구입해 1층에는 식당을 하고, 위층에는 여관을 운영하였지.” (임비호, 2025.4.12.)   < 노년 시절의 육철식 선생 - 김영자 여사 > (출처 : 임비호, 2025.4.1.) 그렇게 나름의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번영회장, 산악회장, 노인회장 등을 맡아 지역사회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갔습니다. 1988년에는 굴곡 많은 삶을 글로 정리해 『빨치산』이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출간했습니다. 기존 저서의 내용 중 틀리거나 빠진 것이 많고, 오자와 탈자가 많아 보완하고자 10년 뒤인 1998년에는, 이 저서의 증보판 『강동정치학원』을 냈습니다. 1991년에는 『봄을 기다리는 낙엽』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어떤 추모비에도 새겨져 있지 않지만, 부강면 노고봉 자락 바위 위에 그의 시를 담은 시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기념하지 않는 그의 삶을 스스로 기록한 흔적입니다.   < 노고봉에 자리한 육철식 시비 > (출처 : 임비호, 2025.4.1.) 육철식은 2007년 무렵부터 파킨슨 병을 앓다가 2022년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북에서는 버림받고, 남에서는 저주받았던” 이들을 어딘가는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전쟁에서 희생당한 이들은 분명 존재했고, 이들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것이 그가 느낀 사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육철식은 국가의 추모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의 이름이 불리는 공식적인 기념행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록은, 우리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영웅으로 불리지 않아도, 순국하지 않아도, 역사의 바깥에서 마을을 지켜온 이름들이 있습니다. 현충일을 맞아 그를 돌아보며 미처 기록되지 않은 우리 마을 주민들을 기억해봅니다. - [참고문헌] 임기현. (2016). 『남부군』의 저자 이태와 『빨치산』의 저자 이영식. 중원문화연구(24집). 대전세종연구원. (2022). 세종인물여행. 경성문화사.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5). 부강면지. 부강면지 발간위원회. 기사 김수현. (2012.8.29.). [부강이야기] 빨치산 출신의 ‘육철식 시인’. 세종포스트. http://www.sj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0 박만순. (2021.8.28.). 한국전쟁 이전 북에 올라간 영동군 청년들. 오마이뉴스. https://omn.kr/1uoot 임비호. (2025.4.1.). “부강에 빨치산 시비가 있다고요(?)”. 세종의 소리. http://www.sj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74238 임비호. (2025.4.12.). "빨치산에서 육군 만기제대, 태극기 휘날렸다". 세종의 소리. http://www.sj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74281  
  • 아름동에서 10년째, 매달 반찬을 나누는 수요일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세종시 아름동에서는 따뜻한 손길들이 하나둘 모입니다. 봉사자들이 하나둘 모여 반찬 재료를 다듬고, 마치 미리 합을 맞춘 듯한 익숙한 손길로 조리를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재료를 다듬고, 누군가는 반찬을 담을 통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금세 조려진 장조림이 줄지어 놓이고, 이내 반찬은 사람 손을 따라 동네 구석구석으로 배달됩니다.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준비 과정 > (촬영 : 2025. 4. 23.) 이 작지만 분주한 움직임은 ‘행복찬드림’. 세종시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마을 돌봄 활동입니다. 세종시 모든 동에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있지만, 그 운영 방식과 성과는 마을마다 다릅니다. 아름동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사례입니다. 봉사자와 행정이 함께 호흡하고 서로를 신뢰하여야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름동은 지난 10년 동안,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 활동을 흔들림 없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준비 과정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준비 과정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준비 과정 > (촬영 : 2025. 4. 23.) 2025년 4월의 넷째 주 수요일인 23일, 이날도 어김없이 봉사자들이 모였습니다. 만들기로 한 메뉴는 장조림. 순식간에 완성된 장조림은 정성껏 포장되어 배달이 되기만을 기다립니다. 봉사자들은 각 가정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 손길들은 오랜 시간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고, 반찬을 전하는 일 또한 특별한 봉사가 아닌 일상의 한 부분처럼 편안해 보였습니다. 한 봉사자는 한 마을 안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 언젠가 우리가 도움받게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합니다. 이 말처럼 행복찬드림은 마을 안에서 서로를 살피는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에서 준비한 장조림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배달 준비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배달 준비 > (촬영 : 2025. 4. 23.) 아름동에서는 2016년부터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위해 직접 반찬을 만들어 전달하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봉사자들 가운데는 초기부터 함께해온 이들도 많습니다. 매달 사전 회의를 통해 다음 달 반찬 메뉴를 정하고, 여름철처럼 음식이 상하기 쉬운 시기에는 밀키트 형태로 제공하는 등 계절과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과일이나 빵 등 외부에서 후원받은 식재료가 있을 경우, 그에 맞춰 구성품을 추가로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 2016년 12월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활동 사진 > (출처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제공)   < 2017년 3월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활동 사진 > (출처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제공) 반찬을 나눈다는 활동은 주민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됩니다. 서로 돕는 구조 속에서 이웃이 홀로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고 주기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활동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가가호호 방문하며 안부를 묻는 과정은 곧 지역 내 소통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민 주도의 민간 자원 연계와 꾸준한 참여를 통해, 이 활동은 마을 안에서 선순환의 관계를 형성해왔습니다.   < 2017년 4월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활동 사진 > (출처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제공)   < 2017년 5월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활동 사진 > (출처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제공) 이러한 지속의 비결은 행정적 효율성보다 사람 간의 유대감과 일상 속 신뢰에 있습니다. 아름동 지사협의 봉사자들은 서로를 ‘위원’보다는 ‘친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찬을 만들고 배달한 뒤, 회비를 모아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상은 관계의 가장 단단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는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네 번까지도 자연스럽게 모이며 관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는 봉사자들뿐만이 아니라 아름동 상인회와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협약(MOU)을 통해 과일, 식재료, 제과류 등을 정기적으로 후원받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름동과 협력해 아름동에서만 쓸 수 있는 ‘아름사랑상품권’을 자체 제작해 저소득 가구에 배포하는 등 지역경제의 자발적 순환 구조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2018년 11월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활동 사진 > (출처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제공) 이들의 기억 속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가득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세종시에서 각 동의 지사협 활동을 평가해 1등을 차지했던 기억이라고 합니다. 물론 누군가가 인정해주길 기대하며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이들이 함께한 시간과 노력을 공동체가 인정해주는 경험은 봉사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보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중 배달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중 배달 > (촬영 : 2025. 4. 23.)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중 배달 > (촬영 : 2025. 4. 23.) 행복찬드림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사명감과 함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 속에서 이어져 온 활동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손의 온기와 마음을 나누며 쌓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이자,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같이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릅니다.   < 아름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행복찬드림'  > (촬영 : 2025. 4. 23.) 이 오랜 시간의 흔적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다른 누군가에게도 마을을 함께 가꾸는 방식이 될 수 있고, 앞으로의 마을을 설계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기록문화관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이들의 경험과 관계의 기억이 기록으로 남을 때 비로소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고, 또 다른 마을에서의 실천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세 개의 창, 하나의 도시 : 세종에서 작업하는 작가들
    도시는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오래 머물며 천천히 길들이는 곳이 됩니다. 세종은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행정 중심의 계획도시라는 이름 아래, 효율과 구조가 강조되는 이곳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작업’이라는 느리고도 반복적인 행위가 과연 이 도시에서 가능할까요? 마을기록문화관은 생명력이 태동하고 활기가 넘치는 5월을 맞아 부드러운 회복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세 명의 작가를 만났습니다. 지난 해, 그들은 연동문화발전소라는 작고 조용한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장소를 살아냈고, 이를 전시로 풀어내기도 했습니다. 천찬미, 정옹, 권현진. 이 세 작가는 각기 다른 매체와 태도로 세종을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은 하나의 공통된 물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도시는 나에게 어떤 장소인가?” 기록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예술은 그러한 인식을 감각의 형태로 번역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을기록문화관에서는 단순히 작가들을 소개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삶의 기록이자 예술적 감응의 지형도로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이들은 세종이라는 도시와 만나며 반응했고, 그 과정 속에서 작업도, 감각도, 삶의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대한 세 가지 다른 시선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단순히 개인의 서사를 넘어, ‘도시와 예술의 관계’를 아카이빙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 1. 정옹 – 돌의 시간, 사물의 감정을 그리는 작가   < 정옹 작가 > (촬영 : 2025년 4월 17일) 정옹 작가는 회화를 기반으로 설치와 출판, 오브제를 넘나드는 시각예술가입니다. 작업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관찰부터 시작합니다. 눈에 익숙한 사물들, 오래된 물건, 들판을 지나는 바람, 시장의 소음. 그에게 익숙한 것들은 언제나 다시 보는 대상이며,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의 조각이 됩니다. 세종에 정착한 이후에도 정옹 작가는 늘 구도심의 풍경을 따라 걸었습니다. 반듯한 아파트 단지보다는 삶의 시간이 축적된 오래된 시장과 골목, 조치원역 근처의 골목집들이 더 많은 말을 건넸기에, 연동문화발전소에 머무는 동안에도 인근을 산책하며 과수원과 들판, 언덕 너머의 오래된 집들을 볼 수 있었던 공간이 마치 힐링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 정옹 작가의 독립출판물 > (촬영 : 2025년 4월 17일)   < 정옹 작가의 독립출판물 > (촬영 : 2025년 4월 17일) 작업실은 풍경의 관찰과 작업의 확장이 맞물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돌을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 붙이듯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돌은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브제지만, 단순한 소재가 아닙니다. 정옹 작가는 돌을 시간을 품은 존재, 혹은 지구의 뼈처럼, 인간보다 오래된 생의 감각을 품은 매개체로 다가온다고 합니다. 강과 산의 돌이 모두 다른 형질을 갖듯, 작가 시선은 그 미묘한 차이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작업만을 해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2019년, 세종에 정착한 이후, 대전발도르프학교에서 교사로서의 삶을 잠시 거쳤고, 그 시간은 그녀로 하여금 ‘내가 정말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을 묻게 만들었습니다. 작업과 생계 사이에서,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순간을 겪었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함께 작업하던 디자이너도, 인쇄소 사장님도 사라졌고, 작업을 지속하던 시기에 만나던 사람들과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소위 말하는 경력단절녀 같은 상황이었거든요. 서울에서는 전시를 계속 하다가 결혼을 하면서 연고가 없는 곳으로 온 것도 그랬고, 또 육아도 해야 했구요. 저도 몰랐어요. 예술가한테도 경력단절이 생길 수 있다는 거를. 근데 이렇게 막 학교까지 나가니까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과감하게 그만뒀을 때 저 같은 케이스가 별로 없었어요. 다들 결혼하거나 육아를 하면 작업을 안 해요. 못하는 것도 있고, 다시 돌아오는 친구들도 별로 없고. 같이 일했던 디자이너나 인쇄소 사장님도 연락하면 없어요.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하니 많이 없어졌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는데 포지션이 되게 애매한 거예요. 신진 작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견 작가도 아니고 그래서 되게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재단에서 좋은 기회가 생겨서 다시 작업할 수 있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고마운 기회가 됐어요. 발판이 된 거죠.” (개인 인터뷰, 2025년 4월 17일) 그런 그녀에게 다시 시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용기였습니다. 작가는 단순히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리는지를 알고 있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그녀는 그렇게 말합니다.   “나무를 봐도 단순히 잎과 꽃이 있다고 보기보다 저는 나무 사이에 있는 그 모양을 보게 돼요. 그곳에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거를 시각예술 작가로서 포착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 인터뷰, 2025년 4월 17일)   < 정옹 작가의 '돌' > (출처 : 정옹 작가 제공) < 정옹 작가의 '돌' > (출처 : 정옹 작가 제공)   < 정옹 작가의 연동문화발전소 레지던시 공간 > (출처 : 정옹 작가 제공) 정옹은 존재보다 그 사이, 사물보다 그 틈을 먼저 감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종은, 그녀에게 그러한 틈이 열리는 장소였습니다. 짧게 머문 연동에서도, 그녀는 사람들과 감정을 주고받았고, 협업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서도 이미 작업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작업실 한쪽, ㄱ자 창으로 스며들던 운동장의 소리들. 아이들의 웃음, 공이 튀는 소리, 수업을 마친 발걸음. 그런 풍경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다시 예술가로서 살아있다는 새로운 자극을 받고,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을 다시금 깨운 시간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작품은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지만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사람과 돌, 풍경과 기억이 스쳐가는 자리, 그 사이에 머무르는 기록. 그것이 지금, 세종이라는 도시에 남아 있습니다. - 2. 권현진 – 디지털의 틈, 빛의 흔들림을 각인하다   < 권현진 작가 > (연동문화발전소, 2024.11.9.) 권현진은 미디어아트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시각예술가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시각을 넘어서서 디지털의 본질과 경계, 그리고 그 경계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흔들림’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종과의 인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홍익대학교를 조치원에서 3년간 통학하며 살았지만, 독일에서의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돌아왔을 때, 그곳은 연기군이 아닌 세종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익숙했던 곳이 낯선 도시가 되었고,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연동면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연동문화발전소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며 처음으로 작업실을 두고 다른 작가들과 함께 머물며 작업하는 경험은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작업해온 그녀에게, 물성을 다루는 타 장르 작가들과의 교류는 신선한 자극이었습니다.   < 권현진 작가의 노트 > (연동문화발전소, 2024.11.9.) 연동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모니터를 오브제로 활용하거나 잘라내는 등 해체적 실험을 지속했고, 이번에는 디지털 이미지를 아크릴 위에 레이저로 각인하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파일은 각인이 되고, 어떤 것은 실패했습니다. 사용하는 모니터마다도 결과가 달랐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불확실성과 한정된 조건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작업은 언제나 확정이 아닌,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과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 작업에는 연동면의 하늘이 등장합니다. 푸른 하늘을 촬영한 영상 위로 깜빡거리는 플리커(flicker) 현상이 흐릅니다. 권현진 작가는 이 플리커 현상이 디지털의 본질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그것을 디지털 매체의 본질적 결함이자, 감각의 틈을 드러내는 언어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연의 레이어와 모니터의 레이어가 겹쳐지는 그 사이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겨진 것’과 ‘흐릿하게 사라지는 것’이 충돌하고 교차합니다. 이는 그녀의 예술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불완전한 흔들림 속에 머무는 감각들입니다. 화면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깜빡거리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인 문제를 작품에 담아낸 것이 아니라, 명확하지 않음, 실패할 가능성, 그리고 여백조차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철학을 가장 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또한 그녀에게 예술은 메시지를 남기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감각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작업을 시작할 때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중심에 두고 고민합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작업, 하나의 전시는 항상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그녀는 예술이 완성되는 순간보다,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여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실패는 멈춤이 아니라, 작업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리듬이며, 흐릿함 또한 또 하나의 유효한 언어라고 믿고 있습니다.   < 권현진 작가의 2024년 《그, 어딘가》 전시 준비 당시 스케치 > (출처 : 권현진 작가 제공) < 권현진 작가의 2024년 《그, 어딘가》 전시장 내 전시를 준비 중인 모습 > (출처 : 권현진 작가 제공)   < 권현진 작가의 2024년 《그, 어딘가》 전시 준비중인 작품 > (출처 : 권현진 작가 제공) 권현진에게 예술은 그런 식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라면 외곽으로 한참을 나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세종에는 가까이 있었고, 신도시의 경계에 자리한 연동면은 서울에서 찾기 어려운 조용함과 밀도를 제공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을 “할머니 집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정제된 이미지가 아니라, 지워지는 과정, 사라지는 감각, 그리고 그 틈에 새겨진 흔적들이었습니다. 예술은 종종, 그렇게 완성이 아닌 흐름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지금, 세종이라는 도시 안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사라짐을 껴안는 감각, 그것이 그녀가 이 도시에 남긴 가장 선명한 흔적입니다. - 3. 천찬미 - 감정의 결을 따라 그리는 사람   < 천찬미 작가 > (촬영 : 2025년 4월 21일) 천찬미는 감정의 결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시각예술가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우울과 회복, 외로움과 사랑처럼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감정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일파스텔과 과슈를 활용한 그녀의 회화는 감정을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색과 형태 속에 머물게 하여, 관객이 그 감정을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읽어내도록 유도합니다. 그림은 크게 말하지 않지만,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각의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그녀는 대전에서 자랐고, 가족과 함께 세종으로 이주한 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막막했습니다. 세종에는 아직 국공립 미술관이 없었고, 전시를 위한 행정적, 물리적 조건 역시 작가가 대부분 감당해야 했습니다.   “친구들은 서울이나 대전에 있으니까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 작업을 해야되고, 이러다 보니 그 당시 전시 주제에 이런 감정이 반영된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오늘의 일기》라든지. 그게 전시 제목이었거든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심심하고 외롭고 이래가지고 오늘 살아내는 게 되게 큰 도전이다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 다음이 《매일 일어나기》.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저는 뭔가 더 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며 정체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그냥 일어나서 손 씻고 양치하고, 그런 아주 사소한 일들을 ‘당연하지 않은 일’로 여기고 감사하면서 해보자고 스스로 챌린지를 했던 시기였어요. 진짜, 너무 심심했거든요.” (개인인터뷰, 2025년 4월 21일) 이 시기는 그녀의 작업 방향을 다시 감각하게 만든 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 첫 개인전은 대전에서 열었지만, 이후 모든 개인전은 세종에서 이어졌습니다.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연동문화발전소 레지던시 역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작업으로 이어지는지를 되짚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작업실에 오가던 어느 날에는 막차를 놓쳐 공간에 머물기도 했고, 마을 어르신들과의 수업에서 뜻밖의 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녀 역시 연동문화발전소에서의 시간을 “할머니 집 같았다”고 기억합니다. 조용하고 천천히 마음이 열리고, 작업의 리듬도 자연스럽게 바뀌었습니다.   < 천찬미 작가 > (촬영 : 2025년 4월 21일) 2024년 전시에서는 과슈라는 새로운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불투명하면서도 맑은 이 물감은, 물의 농도에 따라 감정의 밀도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재료로, 그녀가 그리려는 감정의 구조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감정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그런 물성과 색의 성질을 통해 조금씩 스며들고 머무는 감정의 리듬을 구성해 나갑니다. 그런 그녀의 그림은 하나의 완성된 문장보다는, 하루하루 써 내려간 일기장의 단락처럼 천천히 읽혀집니다.  다가오는 그녀의 개인전의 제목은 《사랑이 가득한 순간》으로, 올해 초 작가레터를 처음으로 발송하며 그린 그림에서 비롯된 이 제목은, 당시 자신에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의 제목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 제목이 세종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이제는 그 외로움을 지나,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는 상태에서 꺼낸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녀에게 사랑이 가득한 순간은 어쩌면 다시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시점의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단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로움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던 시기를 지나, 다시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된 사람의 조용한 회복 선언에 가까웠습니다.   < 천찬미 작가 > (촬영 : 2025년 4월 21일) 그 감정은 선명하게 발화되기보다는, 여전히 색 안에 머무르고, 형태 속에 숨고, 화면의 여백으로 스며듭니다. 그녀의 작업은 감정을 솔직하게 터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감정을 감각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행복이든 우울이든, 그 모든 감정은 그녀의 작업 안에 머물 수 있고, 그림 속 감정은 관객의 내면에서도 천천히 반응하게 됩니다. 세종은 그런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고 머무를 수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외로움도 겪었고, 작업을 멈출 뻔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감정과 감각이 그려낸 회화, 그것은 그녀가 세종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단단하게 남긴 기록입니다. - 도시는 언제나 풍경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감각과 시간이, 도시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냅니다. 세종이라는 공간은 세 명의 작가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관찰했고, 실험했고, 감정을 감각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 도시와 반응하며 자신을 다시 조율해갔습니다.  작업은 기록이 되고, 감정은 색으로 번역되며, 흔적은 조용히 남았습니다. 그 조용한 흔적들을 따라가며 우리는 예술가가 남긴 말 없는 문장들을 읽고 있습니다. 마을기록문화관은 이 글을 통해, 삶과 예술, 공간과 감정이 어떻게 겹쳐지고 흐르는지를 함께 아카이빙하고자 했습니다. 작가들이 남긴 것은 단지 작품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세종이라는 도시 위에 살며시 얹어둔 방식이었습니다. - [참고문헌] 인터뷰 권현진. (2025년 4월 11일). 전화 인터뷰. 장재훈과의 인터뷰. 정옹. (2025년 4월 17일). 대면 인터뷰. 장재훈과의 대면 인터뷰. 세종시 대평동. 천찬미. (2025년 4월 21일). 대면 인터뷰. 장재훈과의 대면 인터뷰. 세종시 새롬동. 인터넷 연동문화발전소. (2024년 11월 9일). 권현진 작가 인터뷰 영상 [인스타그램 게시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eel/DCIi1WbtQgS/?igsh=MWxjdTFya3NqMTNycw==. 연동문화발전소. (2024년 12월 2일). 정옹 작가 인터뷰 영상 [인스타그램 게시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eel/DDEdj06NjZ6/?igsh=MTRrOW9tbTNzaXBnZw==. 연동문화발전소. (2024년 12월 8일). 천찬미 작가 인터뷰 영상 [인스타그램 게시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eel/DDTm7sspd9x/?igsh=ZXhhNzdyNWR6b21m.
  • 연기군의 기억(1) : 연기군청 따라걷기
    우리는 지금 세종시에 살고 있기에 이 지역의 옛 이름인 ‘연기군’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보람동에 자리잡은 세종시청이 있기 전에 연기군청은 조치원읍에 있었고, 그 사실조차 청사 이전 10년이 넘어가는 오늘날 흐릿한 기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기군청은 언제부터 그곳에 자리했으며, 그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질문 하나에서 시작해, 우리는 연기군의 발자취를 따라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고 합니다. 비교적 가장 최근인 조치원읍에 있던 연기군청부터 돌아보겠습니다. 1. 연기군청, 조치원읍 시절 (1911~2012) 1911년, 연기군청은 연기면 연기리에서 조치원면(현 조치원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시점부터 세종시가 출범하는 2012년 6월 30일까지 약 100년간, 조치원읍은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연기군청이 조치원으로 옮겨온 이후 청사의 위치는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1) 1911-1957년 : 교리26번지 (현재 조치원읍 으뜸길 248 한신더휴 아파트 일대) - 조치원역 건너편 현 한신더휴 아파트 일대(조치원읍 으뜸길 248)는 일제강점기 시절 연기군청 소재지였습니다(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1947년부터 1988년까지는 이 지역의 지명이 '교동'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곳에서 근무하였던 주민들의 기억에는 교동 청사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1911년 일제강점기 시절 연기군청 > (사진 : 최석로, 1992, p.118) 일제강점기 시절 조치원에 있던 연기군청 (2) 1957-1985년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에 신축 이전 - 1958년 군청이 들어서면서 군청을 중심으로 여러 관공서들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으로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 소속 공무원들은 주변의 침산리나 서창리에 주로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1985년에 군청이 신흥리로 이전하면서, 이 곳의 건물은 조치원읍사무소로 활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이 곳에 북세종통합행정복지센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로 신축 이전한 연기군청(1957-1985) > (사진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로 신축 이전한 연기군청(1957-1985) > (사진 출처 : 세종문화원, 2016, p.35) - 참고로 1985년에 조치원읍사무소가 이 곳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조치원읍사무소는 1928년부터 교리23-13 일원, 우체국 뒤편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피폭되어 1957년에 신축하였습니다.(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아래 사진은 1957년 촬영된 조치원읍사무소의 낙성식 사진이며, 현재 계룡아파트 부지(새내로143)입니다.   < 계룡아파트 부지(새내로143)에 있던 조치원읍사무소 신축 낙성식 > (사진 : 세종문화원, 2016, p.35) (3) 1985-2012년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 - 1985년에 신흥리에 신축된 청사는 연기군청으로 사용되었으며(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후에는 약 3년간 임시 세종시청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한 연기군청(1985-2012)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한 연기군청(1985-2012) - 2003년 촬영 사진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이후 2015년, 보람동 청사가 완공되면서 시청은 보람동으로 이전되었고, 현재까지 세종시청 본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보람동 세종시청 청사 건축 과정(2014년)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그렇다면 조치원읍으로 오기 전에는 연기군청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름이 '연기군청'이긴 했을까요? 2. 연기면 연기리 시절 (1895~1911) 1895년, 조선은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연기현’을 ‘연기군’으로 승격시킵니다. 이때 군청 소재지는 연기면 연기리였습니다. 현 연기리 425-19 부지가 연기군청으로 쓰이는 곳이었으며, 1911년 조치원으로 이전한 뒤에는 1914년부터 1955년까지 남면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pp.199-204 /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p.2-13)   < 현재 연기면 연기리 425-18 부지 > (촬영 : 25-03-21) 1896년, 다시 칙령 제36호에 따라 연기군은 충청남도에 소속되었고,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의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은 조치원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후 1914년에는 인접한 전의군이 연기군에 통합되며, 행정구역이 확대되고 조치원이 연기군의 실질적인 중심이 됩니다. 3. 그 이전, 연기현과 전의현 시대 ( ~1895) 연기군의 뿌리는 조선시대의 ‘연기현’과 ‘전의현’에 닿아 있습니다.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1413년,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지방행정을 정비했습니다. 1414년, 연기현과 전의현은 한때 ‘전기현(全畿縣)’이라는 이름으로 병합되었다가, 1416년 백성들의 반발로 다시 분리되었습니다. 이때 전의현은 ‘전성현’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두 현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각각 운영되었고, 1895년 연기군과 전의군으로 승격되며 다시 행정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1895년 이후의 연기군 기록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다음 기회에 콘텐츠로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 흩어진 마을의 흔적 조선시대는 물론, 그 이전의 고려시대, 삼국시대에도 이 곳에는 사람들이 살아왔고, 끊임없이 수많은 변화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금남면과 대평동 일대는 본래 공주군에 속해 있다가 연기군에 편입되었고, 소정면·전의면·전동면은 과거 전의군의 관할이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일부 지역은 충청북도 청주군에 속해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예컨대 덕평면이라는 청주군의 월경지 일부가 전의군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경계와는 다른, 시대마다 변화해 온 행정구역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연기현과 전의현의 특산물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연기현은 여우가죽, 수달피, 삶쾡이(삵) 가죽, 전의현은 족제비털, 잡깃(장식용 깃털류)을 올렸다는 기록입니다. 단순한 세금 관련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다뤘던 주민들의 삶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재밌는 기록이자 한 마을이 살아 숨 쉬던 풍경을 그려볼 수 있는 소중한 단서입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뿌리는 ‘연기’라는 이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마을 곳곳 오래된 가게들, 골목 어귀, 그리고 지금도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연기군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후 (2)편에서는 연기리에 남은 청사 부지를 직접 방문하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참고문헌] 간행물 -세종문화원. 2016. 조치원의 옛모습: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세종문화원.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 행정중심복합도시 + 연기군 남면: 남면 연기3리.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연기군지편찬위원회. 2008. 연기군지(상권). 연기군청 문화공보과. -연기문화원. 2011.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I : 금남면, 남면, 동면. 연기문화원. -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연기전의현 관아 조사. 연기문화원. -최석로. 1992.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상권 산하와 풍물. 서문당.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조치원읍지. 조치원읍지 편찬위원회. 인터넷 -북세종 통합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교리”. https://www.sejong.go.kr/shrUrl/pdw75kPJjrnW63EGfs03.do -심정보. 「연기군」.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http://aks.ai/GC07700234.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홈페이지, https://www.cihc.or.kr/kor. -한정수, 김재광. 「연기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10.
  • 연기군의 기억(2) : 옛 군청 터에서 마주한 사람들
    1편에서 연기군청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던 도중, 연기군청이 조치원읍으로 이전하기 전, 연기면 연기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마침 마을기록문화관으로 한 시민이 기록화에 대한 제보를 해주셨다.  연기리에 옛 군청 부지가 있고, 그곳에 있는 보호수들도 알아봐달라는 것. 기록을 따라가던 발걸음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을 좇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 연기리 옛 연기군청 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 연기리 옛 연기군청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연기리를 직접 찾았다. 터는 황량했다. 건물의 터는 알아볼 수 없었고, 그 자리에 고양이와 닭들이 어슬렁거리는 공간 한가운데, 오래된 두 그루의 보호수만이 시간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주변을 한참 둘러보아도 바로 앞 ‘금성주택’이라는 주거지가 눈에 들어올 뿐 어떤 건물이 있었다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 연기리 옛 연기군청 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 연기리 옛 연기군청 터 앞 '금성주택' > (촬영 : 25-03-21) 이 곳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마을복지회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마을뿌리전시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기리의 역사와 생활자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전시관에서는 기대와 달리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 연기복지화관 마을뿌리전시관 입구 > (촬영 : 25-03-21)   < 연기복지화관 마을뿌리전시관 내부. 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 (촬영 : 25-03-21) 복지회관 안 경로당에 계시던 할머니들께 여쭤보았더니 대부분 이 터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나 ‘연기군청’이라는 이름보다는 ‘남면사무소’로 불렀다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건너편 게이트볼장에 가 경로회장님을 만나보길 권해주셨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연기1구 경로당 회장 하태영님.   < 연기1구 경로당 회장 하태영님 > (촬영 : 25-03-21) 하 회장님은 과거 이곳 면사무소를 철거할 때도 현장을 직접 보셨다고 했다. 당시 나온 자재들을 실어다가 종촌리에 새로 지은 면사무소에 그대로 사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 면사무소의 현관 기둥을 받치던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양조장을 운영하던 누군가 사갔고, 그걸 사간 사람이 연서우체국도 함께 사셨다는 것. 나는 연서우체국으로 향했다. 별정우체국이었기 때문에 사실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 연서우체국 전경 > (촬영 : 25-03-21) 우체국 직원에게 돌기둥 이야기를 꺼내자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돌아서려는 순간,  직원이 갑자기 “어?!”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혹시… 그 옆집에 있는 그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설마? 하면서도 옆집으로 향했다.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우체국과 옆 가게 모두 한 국장님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 우체국 국장님과 통화로 관련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엔 단호하게 부정하셨다. “이건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거예요. 누가 그걸 사왔다는 거예요?” 하지만 증조할아버지 성함을 여쭤보자, 놀랍게도 하 회장님이 말한 이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쉽게도 1911년까지 연기리에 있던 연기군청이나 남면사무소의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어디에 있었던 기둥인지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헌들이 사라진 시점에 마을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따라 맞춘 퍼즐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었다. 기록은 그렇게 한 조각씩 이어졌다. 기록을 모은다는 일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세종의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남겨진 흔적, 말해주는 사람, 그리고 걷는 발걸음 사이에서 그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다. [참고문헌] 간행물 -세종문화원. 2016. 조치원의 옛모습: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세종문화원.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 행정중심복합도시 + 연기군 남면: 남면 연기3리.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연기군지편찬위원회. 2008. 연기군지(상권). 연기군청 문화공보과. -연기문화원. 2011.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I : 금남면, 남면, 동면. 연기문화원. -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연기전의현 관아 조사. 연기문화원. -최석로. 1992.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상권 산하와 풍물. 서문당.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조치원읍지. 조치원읍지 편찬위원회. 인터넷 -북세종 통합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교리”. https://www.sejong.go.kr/shrUrl/pdw75kPJjrnW63EGfs03.do -심정보. 「연기군」.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http://aks.ai/GC07700234.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홈페이지, https://www.cihc.or.kr/kor. -한정수, 김재광. 「연기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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