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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종 이야기

우리지역의 충신,효자,효부의 정려(효부편)
글 / 지역문화기록가 한종열 효부 정려 기록을 위해 자료를 찾던중 현대사람 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기록은 기록가가 판단하여 기록에서 제외하였다 예를들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먹였더니 병이 금방 낫더라 등 이와같은 경우는 기록에서 제외시켰다 물론 근거 없는 사실임에도 효부임을 강조하려고 기록을 한 줄은 알고 있으나 자연 스럽게 제외 하였음을 미리밝힌다   이 정려는 현 주소지인 응암리 산 45번지에 세워졌으며 시기는 1877년 고종 14년에 명려. 정문 건립, 1962년 정려를 정면 1칸 측면 1칸,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서 양측면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고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8각 고주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정려 4면은 홍살 처리 하였으며 창방 위에는 2개의 화반 대공을 놓았다 그리고 중앙에 세워진 비석정려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1877년에 명정받은 열녀 사인(士人) 박기정의 처 광산김씨 정려임을 기록한 명정 현판이 열녀 사인 박기정처 유인광산 유인 김씨 지여 숭정후오 병자 성상13일 11월 일 명정(171 × 35 烈女 士人朴基正 妻 孺人光山金氏 之閭 崇楨後五 丙子 聖上13年 十一月 命族 )이 걸려 있다 또한 중앙에 세워진 비석은 1900년에 세운 것으로 화강암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옥계형 이수를 올렸으며 전면에는 열녀 사인 박기정처 광산김씨 지여 (烈女 士人박기정(朴基正, 妻 光山金氏 之閭)라고 새겨저 있고 나머지 3면 에는 1950년에 성기운(成璣運) 이 추기(追記)하고 병서한 정려기가 음각되어 있다. 이 정려는 열녀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그당시 지방에 행차 했던 도백이 김씨의 열행 듣고 나라에 보고하여 1877년(고종14년)에 명정을 받았다 이 정려기는 1877년 명정받을 당시 우의정 송근수가 글을 짖고 민영태가 글을썼다 그러나 당시는 현재와 같이 정녀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깃집의 대문에 명정현판을 게판하는 형태 것 같고 그후에는 종가의 사랑채 들마루에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손들은 항상 정려가 건립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중 신기하게도 1944년 돌무더기가 한 달 가량이나 계속 떨어지는 이변이 계속되자 집안에서 돈을 내어 100일간 경을 읽었다고 하며 이를 기화로 김씨의 현손 박용래등이 1952년 4월에 정려를 건립하고 명정 현판의 내용을 음각한 정려비의 3면에 성기운이 찬한 정려기를 음각하였다 1955년(을미년) 상량한 대들보가 남아 있으며 1965년에는 청기와로 지붕을 단장 하였다 그러나 2∼3년 후 기와를 새로 올렸으며 1980년대 말 군의 보조를받아 보수하여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열녀 광산김씨는 광성군 김국광의 후손인 김귀택의 딸로서 무안박씨 가문의 박기정(1792∼ 1830)에 출가 하였는데 혼례를 치룬 3일후 처가에 갔을때 뜾밖에도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었다 김씨가 지성으로 간호 하였으나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김씨는 3년간 시묘에 정성을 다하고 수절하면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당진에 사는 먼 친척 아이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무안박씨가 동면에 처음 들어온사람은 함일, 선일, 행일 의 3형제 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들의 선대는 당진군 고대면 전관리에서 세거 하였는데 17세기 중반경에 맏형 홍일만이 당진에 남고 3형제가 모두 연기지역으로 이주 하였다. 박함일,선일,행일이 동면으로 이주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는 함일의 처가 경주김씨인데 경주김씨가 동면의 토성이자 대성인 점 선일의 처가가 동면 응암리 마을에 세거하고 있던 청주한씨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처가가 있는 인연으로 동면에 정착 하게된겻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연기에 정착한 박선일은 영녀 김씨의 남편인 박기정의 고조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공준길의 문하에서 공부 하였다 부모상을 달하여 시묘를 하는데 흰제비가 날아와 집을 지었는데 새끼 또한 횐색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제비도 선일의 효에 감동된 것이라 하여 여러 차례 나라에 알렸다고 한다 증조인 창과 조부인 동환, 아버지인 병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4대가 모두 읍지에 효자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열녀 광산김씨는 이와같이 대대로 효성이 지극한 짐안에 출가하여 집안의 전통을 이었고 양자인 응현 또한 그 전통을 물려받아 지극한 효성으로 세금을 면제 받았다 열녀 김씨의 묘소는 동면 응암리 산 42번지 에 있다 열녀 김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여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 하였으며 삼강오륜의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다, 덕망 높은 가문에서 예의범절을 두루익히며 자린 rlaT는 무안박씨 가문의 박기정에게 출가 하였는데 박기정은 이미 초혼에 사별하고 김씨와 재혼한 것이었다 무사히 혼례를치룬 3일 후에 뜾밖에도 남편 박기정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혼의 꿈이깨진 김씨는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밤낮으로 간호 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생가다 못한 김씨는 천지신명께 기도하고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원 하였다 김씨가 약을 다리다가 깜박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두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그 중 한 노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내가 너의 시아버지다 어린나이에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고치려고 간호 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치하의 말을 끝낸후 “여기 이 약으로 고생한 네 다리를 고치거라〃 는 말을 나기고 사라져 버렸다 김씨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옆에 시아버지가 건내준 약이 있어 그것을 바르니 다리가 씨은듲이 나았다고 한다 아마 남편의 병을 고치기위해 여러방면으로 수소문하여 좋다는 약을 구하려 여기저기 뛰어 다니다 보니 자신의 다리가 이미 병들어 못쓰게 되어음을 몰랐던 모양 이었다 그러나 그년의 정성으로 잠시 의식을 되 찾는 듲 하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남편의 빈소를 지키던 광산김씨는 극약을 마시고 그뒤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는때 친정 숙모의 꿈속에 다시 두 노인이 나타나더니 “급히 내 새 며늘아기를 구해 주시요 하거늘 깜짝놀라서 급히 달려가서 구해내고 말하기기를 남편이 죽어서 후사가 없으니 너는 마땅히 슬픔을 참고 살아서 양자를 들여 조상을 받들게 하는것이 너의 직분이라 하니 유인이 이에 관대히 참고 상여를 따라 남편의 집에와서 삼년을 시묘 살이를 하고 난 후 일가집 아들 응현을 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다   선영이 남에게 늑장을 (남이 나의 묘 가까이 씀)을 당해서 여러차래 소송을 제기 했으나 패소함에 유인이 구년동안 하늘에 기도를 하고 열손가락을 다베어 혈서를 써올려서 써 마침내 그묘를 파내게 된것이다   아! 세상이 말하는 열녀는 살을베고 약을먹고 자결을 하고 마음을 들여 종신토록 의리를 지키고 양자를 들여 조상을 받들었고 위로는 죽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아래로는 종갓집을 무궁하게 뻗치게 했으니 한낱 의리를 따라 죽는데 비할바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대소(大小) 는 비록다르나 진실한 행실은 괴로움에 어렵고 쉬움을 얻은것이라 하나 이런고로 고종 병자(高宗 丙子:서기 1876년)에 마을 앞에 정려를 세운 것이 이같이 빛난것이라 내 가 바야흐로 천지가 들끊고 삼강오륜이 없어진 때를 만나서 다만 걱정을 할 뿐 구제할 힘이 없는데 유인의 현손 용례(容來) 가 정여에 기문을 청하니 말세에 융희 권선징악(勸善懲惡)이 됨으로 힘을 내어 찬양하라라 기원후 경인모춘(1950년 3월)에 쓰다(1950年 三月) 붓을들어 글쓴이 : 성기운 기함 출처 (1) 자료 수집 2026년 6 월 자료를 수집하기위해 응암리 이장(박종록) 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 상당히 반가워 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하기로 함   (2) 개인 소장 사진·자료 [형식] 개인 소장의 자료는 전각 관련 내용을 탁본한 탁본 기록만 남아 있으며 기타 자세한 자료는 면사무소, 문화원,이외는 찾기가 어려움 (3) 작성자 직접 촬영 사진 전부 필자가 직접 촬영 한 것임 (4) 지역지·신문 기사 기록을 찾지못함(없는 것으로 사료됨)   (5) 향토사·지역 단행본 2001.5 향토유적지정 대상 문화재 등록현황 자료-2001.5월 연기군 발행 2015년 7월 세종향토사 발표대회 자료집 백제의 얼, 세종에 새기다 기록 책자 연기 향교지지 2008년2월 발행 발행인 전전교 박종관. 이해준 공주대 교수,윤윤종(공감엔터테이먼트)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1권-2011년 12월 연기문화원 발행 동면편 지은이:임선빈,남정환,윤윤종 연기군지(하권)2008,4 연기군지 편찬위원회, 연기군청 문화 공보과 연기군지 1988,12 연기군지 발행 편찬 위원회 연기군 충,효,열 유적 1998, 12 연기군,공주대학교박물관-공동 발행 (6) 보고서·행정자료 지역 향토집등 관내에서 기록 보존책자 에는 많이 분포되어 있음 (7) 학술논문 없는 것으로 판단됨 (8) 웹자료 전혀 참고로 하지 않음 ※블로그, 나무위키,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인터넷 상의 문헌 등 사용 불가 웹자료는 참고용, 보조용으로만 활용!    
  • 월하리들 모심기
    글 / 지역문화기록가 장방례   촬영자 : 미상(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추정) 촬영일자 : 1972년 6월 1일 사진 제목 :월하리들 모심기 1    위 사진들은 윤윤희씨 부친 윤종남(1930~2002)씨의 앨범에서 윤윤희(1968년~ ) 씨가 찾아낸 사진으로 연기군 연서면 봉암2리 마을 주민들이 들판 가득 나와 모심기를 하는 모습이다. 사진에 촬영 장소 및 촬영 일시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사진 제공자이신 윤윤희씨가 마을 어르신 채만종(1937~ ), 윤종욱(1943~ )님께 여쭈어본 결과 촬영 장소는 월하리 구서원 월하리들로 현재는 월하리 항공학교에 편입된 들판이라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하여 마을 주민 대부분이 나와 모심기를 하였으나 아쉽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오지 않고 김종필 국무총리가 왔으며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속에는 둑방에 시멘트 방벽을 쌓아 놓은 모습도 보이며 당시 월하리 들판은 월하리 주민들보다는 봉암2리 주민들이 주로 농사짓던 삶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촬영자 : 미상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추정) 촬영일자 : 1972년 6월 1일 사진 제목 :월하리들 모심기 2 사진을 보면 <사진 1>은 모자를 쓴 남성들만 모여 모내기를 하고, <사진 2>는 못줄 잡은 남성을 제외하면 머릿수건을 쓴 여성들만 모내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할 때도 남녀가 나뉘어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못줄을 잡은 남성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곤히 잠든 아기를 업은 채 일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모내기는 사람들이 일일이 모를 심어야 해서 일손이 모자랐음도 알 수 있다.   촬영자 : 미상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추정) 촬영일자 : 1972년 6월 1일 사진 제목 :월하리들 모심기 3   촬영자 : 미상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추정) 촬영일자 : 1972년 6월 1일 사진 제목 :월하리들 모심기 4 김종필 국무총리가 모심기 시찰을 나와 사진 촬영을 한 것은 기억나지만 정확한 촬영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채만종 · 윤종욱씨의 구술 내용을 참고하여 사진의 연유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네이버에 ‘연기군 모내기 김종필’로 검색해보았다. 그 결과 1972년 6월 1일 중앙일보에 아래와 같이 관련 기사가 실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1972.06.01 00:00 지면보기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연기=김두겸·조남희기자】제24회 권농일 기념행사가 1일 충남 연기군 서면 벼 집단 재배단지 현장에서 거행됐다.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 3부 요인과 많은 농민 대표가 이 기념식에 이어 올해 처음으로 전국 농가에서 재배되는 통일벼의 모심기 설명과 모심기가 있었으며 가도별 여자4H대표부원의 모내기 경진 및 우수한 국산 모내기 기계 전시가 있었다. 김 총리는 치사를 통해 『통일 볍씨도 내한성과 병충해에 약한 문젯점을 개선해서 다수확을 얻도록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권농일 기념행사는 다수확을 위한 조기 육묘를 위해 작년부터 열흘 앞당겨 정하고 있다. 한편 서울시는 1일 상오 10시30분 영등포구 발산동 소재 원당 사거리 옆 기념식장에서 심탁식 서울시장을 비롯한 농촌지도소. 농업 단체직원 및 농민 9백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가졌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22437   이 기사에 보면 행사 장소가 연기군 연서면이 아니라 연기군 서면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서면이 연서면의 오타인가? 아니면 이 기사가 모심기 사진과 관련 없는 것인가? 싶어 다시 확인이 필요했다. 사진 제공자 윤윤희씨에게 기사 내용을 확인한 바 1972년 당시엔 봉암리가 연기군 연서면이 아니라 연기군 서면이었고, 세종시로 편입되면서 서면이 연서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따라서 위 사진들은 중앙일보 기사대로 김종필 총리가 권농일 행사의 일환으로 연기군 서면 월하리들 일대에 나와 모심기 행사를 했던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위 기사로 미루어볼 때 식량이 부족하고 산업화 이전이던 1972년만 해도 국가적으로 농업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 재배를 권장하였으며 국가가 권농일을 지정하여 식량 생산을 권장하였고 모내기 기계가 도입되는 시점이었음도 알 수 있었다.   출처   (1) 구술 인터뷰 윤윤희. (2026.06.10.). 월하리들 모심기 [구술 인터뷰]. 장방례, 세종시 산울동 세종특별자치시교육청 평생교육원    (2) 개인 소장 사진·자료 윤윤희. (1972). 월하리들 모심기 [사진]. 개인소장.   (4) 지역지·신문 기사 [연기 김두겸 조남희 기자]. (1972.06.01). 권농일. 중앙일보
  • 세종시 원주민 신상원통장(76세)님의 경찰관 아들의 ‘충남 금남면 금호중(현재 세종시 대평동)1990년대’ 이야기
    글 / 지역문화기록가 이윤송 현재 세종시 도담동 자택인 76세(1951년생) 신상원(통장)님은 평생을 ‘충남 금남면 감성리’에서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 피,땀으로 이제는 부모님 하늘나라로 평안히 보내드리고 어린자식은 자라서 든든한 경찰로 근무하며 국민을 지킨다. 당시 아들의 1993년~1996년 충남 금남면 감성리 금호중(현재 세종시 대평동 소재)시절의 기록물에 대해 설명해주셔서 그 당시 시대상을 함께 인터뷰해본다   (1993 년)–당시 금호중 제작앨범- <금호중 교기와 교가 ,교실>   (1996년 장학증서)-기록처인 신상원자택에서 이윤송촬영- <한장의 볼품없는 종이로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받기 힘든 참 귀한 장학증서였다>   (1996년 상장)-기록처인 신상원자택에서 이윤송촬영-<금호중 졸업식때 받은 3년 개근상>   (1993)-신상원 소장처-<고출산 당시의 사복입은 중학교 입학생들과 교복입은 수많은 재학생들>   (1990년대 촬영)-촬영 미상- < 연통이 연결된 석탄때는 난로가 있는 금호중 교무실 > 30여년전 학교 교무실의 정겨우면서도 아날로그적인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장부근에 길게 설치된 은색 연통(연기 배출관)’이 눈에 뛴다 ‘조개탄을 사용하는 대형난로’를 두어 난로 주변으로 온기가 퍼지지만 완벽히 단절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사진 속 선생님들은 두툼한 체크무늬 등 겨울철 방한복을 실내에서 입고 근무하고 계신다 책상위에는 요즈음의 PC 모니터 대신 두꺼운 장부, 서류철, 교과서와 참고서들이 쌓여 있는 것이 모든 행정업무가 전산화되기 전이라 결재 문서나 학생 기록을 ‘모두 종이로 처리하던 시대’임을 보여준다 요즘 교무실은 책상사이에 파티션을 쳐서 개인 프라이버시를 높이지만 여기는 파티션이 없거나 매우 낮아 선생님들이 서로 마주 보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1990년대 금호중 교무실은 비록 지금보다 물질적으로는 조금 불편하고 투박했을지 몰라도, 난로 주변에 모여 온기를 나누던 선생님들의 인간적인 정과 아날로그적인 따뜻함이 가득 느껴지는 소중한 풍경이다.   (1995년 촬영)-촬영자미상-< 금호중 체육대회 광복 50주년 입장식>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유관순 열사 복장의 학생부터, 노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 그리고 저 멀리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학생들까지 ! 지금의 세련된 체육대회와는 또 다른, 투박하지만 정성가득한 손글씨 플랜카드까지 광복 50주년의 벅찬 감동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운동장을 누비던 소년, 소녀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전해진다.   (1995)- 촬영자미상- < 아들의 학창시절 절친들> 이제는 커서 우리 국민을 지켜주는 어엿한 경찰임을 자랑스러워 하시는데 교복입은 아들의 사진을 설명할 때는 품안의 어린 자식 같으신가 보다   (2026.6)-이윤송촬영-<신상원 소장처 현재 자택 : 세종시 도담동 803동 505호> 출처 (1) 구술 인터뷰 인터뷰 상대. (연도. 월. 일). 인터뷰 내용 설명 [구술 인터뷰]. 인터뷰 실시자, 장소.   신상원님. (2026.6.8.) 신상원님의 경찰아들의 ‘충남 금남면 감성리 금호중 이야기’. 이윤송. 신상원통장님 아파트(세종시 보듬3로 7, 803동 505호) ).     2) 작성자 직접 촬영 사진 [형식] 작성자. (연도). 사진 설명 [사진]. 촬영 장소.   이윤송. (2026). 소장처 신상원통장님 현재 거주지 아파트 : 세종시 도담동.  
  • 금호중 앨범으로 바라본 1950년대의 중학교의 모습
    글 / 지역문화기록가 이승표      금호중학교는 1952년도에 개교한 전통있는 학교이다. 이 학교는 현재의 장영실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세종시 금남면 호탄리에서 1952년 5월 15일 개교하였지만, 세종시 신도시 개발과 함께 진행된 학교 이전계획에 따라 지난 2018년에 세종시 대평동 77-79번지에 새로이 학교를 짓고 둥지를 틀었다. 2026학년도 현재 이 학교에는 21개 학급 53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1953년도에 제1회 졸업생 배출을 필두로 올해 74회까지 모두 14,07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역문화 기록을 위해 수집한 금호중학교 제5회 졸업 앨범은 1957년에 발간된 것으로, 겉표지에는 ‘追憶, 4290’으로 표기되어 있어 그 무렵에는 서기와 단기를 혼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앨범속의 주인공들은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인 1956년도에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인데, 졸업생 143명 중 여학생은 14명에 불과하여 당시의 여성들은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앨범 앞부분의 ‘建設’이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학생들이 학교 건축 현장에서 근로하고 있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護國團 訓鍊朝會 行列’ 제목의 사진에는 학생들이 대열을 지어 학교 운동장을 행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 앨범의 중간 부분에는 ‘紀行’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의 수학여행 모습을 담고 있다. 부여 사비루, 갑사 대웅전, 공주 산성, 청벽 유원지 등의 수학여행지에서 촬영된 사진의 설명글에는 ‘4289.10.16.(1956년 10월 6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관촉사의 미륵불(충남 논산시 은진면 소재)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한 모습, 공주 금강철교에 수학여행 버스가 통과하는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健康’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진 중 ‘全體 國民 保健 體操’는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집단으로 체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부산-서울 역전 마라톤’이라고 쓰여진 사진에는 세종지역을 통과하는 전국적인 마라톤 대회를 학생들이 도열하여 응원하는 모습도 실려있다. 단기 4289년 6월 15일(1956년)에 촬영된 사진에는 학생들이 학교앞 논에서 모내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조국은 부른다 젊은 학도여’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운동장에서 웅변대회를 하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다.   한편, 1958년에 발간된 금호중학교 제6회 졸업앨범의 겉표지에는 ‘追憶, 4291’로 표기되어 있고, 속표지는 ‘卒業記念寫眞寫眞帖, 第6回, 1958, 錦湖中學校’로 기록되어 있다. 앨범의 앞머리에는 교가와 학교의 전경을 싣고 있으며, ‘護國團 訓鍊朝會’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1957년에 발간한 앨범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대열을 지어 운동장을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校地保健場整地에 學父兄의 作業光景’, ‘保健場整地에 學生들의 作業光景’, ‘地方民의 勞苦에 감사를 드리자’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학생과 학부모, 지역주민이 함께 힘을 합쳐 학교를 지어가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다. 미래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지역의 주민 모두가 팔을 걷고 나서 힉교 조성을 지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앨범에는 학생들이 김매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개교 제 5주년 기념 체육대회를 개최하면서 촬영한 사진에는 ‘4290.10.9.(1957년)’으로 날짜가 표기되어 있고, 가장 행렬 등 체육 관련 행사 모습이 다양하게 촬영되어 있다. 이 행사 광경에는 ‘우승 조치원교동교남자부’, ‘우승 연동국민교여자부’, ‘유치원원아놀이’, 錦南國校女兒出演‘ 등의 제목의 사진이 실려있어, 당시 지역 중심학교인 금호중학교의 체육대회에 인근 학교까지 참가하여 매우 성대하게 열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앨범의 마지막 부분에는 학생 앨범위원들의 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하단에 써 놓은 다음의 후기가 가슴 아픈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우리 실정에 맞는 사진첩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장벽을 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벗들이 변변치 못한 이 사진첩을 볼 때마다 순진 무구했던 이시절을 생각하면서 젊어졌으면 다 같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사진첩을 엮음에 있어 헌신적 노력을 해주신 연일 사진관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1958.3.2”. 아래는 1957년과 1958년에 발간한 금호중학교 앨범에서 발췌한 사진이다.   <학생들의 조회 행렬 및 근로 모습, 출처 ;1957년도 졸업 앨범> <6월 모내기 및 웅변대회 모습, 출처 ;1957년도 졸업 앨범>   <수학여행 모습, 출처 ;1957년도 졸업 앨범>   <1958년의 금호중학교 모습, 출처 ;1958년도 졸업 앨범>   < 1958년의 금호중학교 모습, 출처 ;1958년도 졸업 앨범>   < 개교 제5주년 기념 체육대회 모습, 출처 ;1958년도 졸업 앨범>   <1958년도 졸업앨범 후기, 출처 ;1958년도 졸업 앨범>   출처 <참고 자료> 追憶(4290). 금호중학교 1957학년도 졸업앨범. 追憶(4291). 금호중학교 1958학년도 졸업앨범. 금호중학교 학교 소개. 금호중학교 홈페이지(http://geumho.sjedums.kr(2026.6.22.)
  • 조선시대의 세종시 지역 사찬지도 및 공주목,문의현 관찬지도
    글 / 지역문화기록가 윤철원 < 사찬지도>   ○ 지도 1 : 동국지도 동국지도는 1589년 이전에 목판본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전체 지도는 8장의 도별도(道別圖)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의 세종시 권역은 충청도 지도에 속한다. 지도 중심부의 전의현과 연기현 경계 지점에 오봉산(五峯山)이 표기되어 있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 지도 2 : 청구도 청구도는 1834년(순조 34) 김정호가 제작한 총 4권 구성의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도로망과 수계(水系)를 비롯하여 산맥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전의현과 연기현을 포함하여 당시 공주목 관할 장척동(장군면)과 삼기면(나성동), 양야리면과 명탄면(금남면), 연기현과 문의현 읍치 중간에 있는 서삼도면(西三道面, 부강면) 등이 현재의 세종시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 지도 3 : 동여도 이 지도는 김정호가 1849년(헌종 15)에 제작한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특히 오늘날의 미호강을 동진강(東津江)으로 명기한 점이 눈길을 끈다. 지도 내부에는 주요 산의 명칭이 수록되어 있으며, 도로망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점을 찍어 지역 간의 거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점과 점 사이의 한 칸은 10리(약 4km)의 거리를 나타낸다.     ○ 지도 4 :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에 김정호가 제작한 목판본 지도이다. 이 지도는 앞서 제작된 동여도에 비해 지형지물의 표시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는 대량 인쇄가 가능한 목판으로 판각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축소·생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기현의 좌측(서쪽)에 운주산(雲住山)을 표기한 것은 오류로 추정된다.     ○ 지도 5 : 청구요람(전의현) 청구도 제작(1834년) 이전에 김정호가 그린 이 지도는 청구 요람 18층 13판 도면이다. 이 지도의 특징은 산줄기를 선으로 표시한 다른 지도들과 달리 산봉우리 모양만으로 산세를 표기했다는 점이다. 전의현 지도의 좌측(서쪽)에는 '청주지(淸州地)' 덕평면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소정면 일원이다. 전의현 위쪽의 목천현 경계선과 지도 중간중간을 노란색으로 채색한 것은 지도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이다. 지도 하단부에 '연기지(燕岐地)'라고 표기한 구역은 연기현의 관할 구역임을 나타낸다.    ○ 지도 6 : 청구요람(연기현) 이 도면은 청구요람 19층 13판이다. 연기현의 관할 구역을 온전하게 보려면 18층 13판과 19층 13판을 서로 연결해야 한다. 이 도면 우측(동쪽)에 노란색 선으로 표시된 지역이 문의현의 관할 구역이다. 그중 서삼도면(西三道面)이 오늘날의 세종시 부강면에 해당한다. 연기현 읍치를 나타내는 사각형 표기의 좌측에 ‘고려 한희유가 여기서 합단적을 격파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표기가 눈길을 끌며, 그 아래에는 원수산이 그려져 있다.   < 장군면, 부강면 지역 관찬지도>    ○ 지도 7 : 1872년 공주목 지도 이 지도는 1872년 지방 관공서에서 제작한 공주목 지도이다. 이 지도의 방위는 현대 지도와 반대로 설정되어 있다. 즉, 동쪽이 좌측, 서쪽이 우측, 남쪽이 상단, 북쪽이 하단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지도의 좌측 하단(북동쪽)에는 장척면(현 장군면)과 삼기면(나성동)이 보이고, 금강 위쪽으로는 양야리면과 명탄면(현 금남면)이 확인되나 지형과 맞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의 전월산(轉月山)을 '견월산(見月山)'으로 표기한 점이 이채롭다.    ○ 지도 8 : 1872년 문의현 지도 이 지도는 1872년에 지방 관공서에서 제작한 문의현 지도이다. 지도의 방위는 상단이 남쪽, 하단이 북쪽을 향하도록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의현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하단(북서쪽)에 위치한 삼도면(三道面)이 오늘날의 세종시 부강면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 상단에서 우측으로 치우쳐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 하천이 금강이다. 출처 (1) 웹자료   ○ 지도 1 : 동국지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一簑 古 912.51-D717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고지도 > 목판식(기타) > 동국지도 > 충청도 >   ○ 지도 2 : 청구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古 4709-21-v.1-4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고지도 > 필사본(방안식) > 청구도   ○ 지도 3 : 동여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奎 10340-v.1-23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동여도 ○ 지도 4 : 대동여지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奎10333-v.1-22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대동여지도   ○ 지도 5 : 청구요람(전의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古 4709-21A-v.1-2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고지도 > 청구요람 > 전의현   ○ 지도 6 : 청구요람(연기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古4709-21A-v.1-2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고지도 > 청구요람 > 연기현   ○ 지도 7 : 1872년 공주목 지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청구기호모음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필사본 회화식 > 1872년 지방지도 > 충청도 > 공주목지도   ○ 지도 8 : 1872년 문의현 지도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ttps://kyu.snu.ac.kr/ 청구기호 : 청구기호모음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필사본 회화식 > 1872년 지방지도 > 충청도 > 문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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