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록문화관 다담

Home

오늘의 세종 이야기

정월대보름, 장군면 송문리의 샘고사
[글 / 시민기록가 김효섭]   어릴 적 추억이 생생하기도 하고 관심도 많고 해서 올해 정월 대보름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미리부터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검색도 해 보았다. 때마침 장군면 송문리에서 정월대보름 행사를 마을 대표 우물에서 “샘고사”를 지내며 농악놀이도 한다는 정보가 있어 마을 이장님께 미리 연락을 하고 부푼 마음을 안고 정월대보름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디지털 세종시 문화대전”을 접하게 되었는데, 장군면 송문리의 대표 우물로 “송정안샘”을 소개하면서 “매년 정월 열나흗날 오후에 송정안샘 앞에서 샘고사를 지내다가 1990년대에 중단되었다”고 기록된 것을 보고 아쉬움이 아주 컸다.    이 내용을 이장님께 알려드리니 “뭔 소리래유? 우리 마을은 쭈욱 정월대보름 행사를 해 왔슈.”, “올해도 할거니께 걱정마슈”라며, 3월 1일 일요일 아침 8시에 우물 청소하면서 시작한다고 전해주셨다.   2014년 4월에 발행된 “장군면지(將軍面誌)”를 확보해서 확인한 결과,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송문리에는 두 개의 공동우물이 있는데 송문리를 구성하는 문성마을과 송정마을에 각각 공동우물이 하나씩 있는데, 문성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정월대보름이면 샘고사를 지내고 있고, 송정마을에서는 샘고사를 지내지 않고 간단한 제사만 지내고 있어 디지털 세종시 문화대전에서는 송정마을 공동우물(송정안샘)을 송문리 대표우물로 표현한 것이고 본 기록가는 문성마을 공동우물(현재 이름: 세심정)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 정월대보름 행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문성마을 공동우물 세심정(洗心亭)    문성마을 공동우물 세심정은 예부터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며, 때로는 아낙네들의 빨래터로도 사용되면서 아낙네들끼리 힘든 시집살이와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며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던 힐링 장소이기도 했다. 이 우물은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명당중의 명당인데 "멀리 있는 천태산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서 가뭄에도 우물물이  안 마르는 거유“ 라고 마을 어르신 윤영욱 선생님이 알려 주신다. 옆 마을  송정 우물은 비 올 때나 많지 가뭄 때는 바짝 마르니 우물도 아니라며 세심정의 우수성을 비교 설명하신다. 예로부터 우물 아래 논을 세시미라 했는데 ”우물 근처 논들은 죄다 이 물을 갖다 쓰니께 농사 짓는데 아무 탈이 없었제. 가뭄이 와도 끄떡없었슈“라고 자랑하신다. ○ 2014년 이전의 세심정 모습   (출처: 장군면지. 2014년 발행) 2014년 이전 사진을 보면 세심정이라는 간판도 없고 가느다란 철골 기둥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덮어 빗물이 샘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어 있고 마을에서 쉽게 내려갈 수 있게 양쪽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우물 뒤편에는 무슨 나무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나무 한 그루가 우물과 함께 마을의 식수처를 잘 지켜 주고 있는 모습이다. ○ 2017년 세심정의 모습   (출처: 세종시 기고사) 세심정 주변에 금줄이 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월대보름 사진으로 추정됨   2017년 세심정의 뒷모습을 보면 세심정(洗心亭) 간판이 달려 있는데 이 간판은 2014년에 새로 설치 되었지만 기둥과 지붕은 과거 모습은 그대로 이고 세심정 뒤편의 나무는 향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심정 우측은 가건물 형태의 창고가 지어져 있어 미관상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다. ○ 2026년 세심정의 모습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3일), 2017년 사진과 동일한 위치에서 촬영함)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이후 세심정의 모습을 보면 기둥이 좀 더 튼튼한 나무기둥으로 교체되고 지붕도 기와 모양으로 새단장을 하였으며, 10년의 세월이 지난 향나무도 훨씬 무성하게 자랐으며, 가건물 창고 위치에는 휴식을 위한 정자를 새로이 설치하여 마을 주민들이 세심정 우물터와 향나무를 벗삼아 힐링하는 휴식공간으로 거듭난 모습을 하고 있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2014년 이전 사진과 동일한 위치에서 촬영함)   2014년 이전 사진과 비교하기 위해 세심정 전면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훨씬 깔끔한 모습으로 변신하였고,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를 가진 세심에 정자정(亭)을 붙여 세심정(洗心亭)으로 이름하였는데 우물정(井)을 쓰지 않은 것은 바로 옆 휴식 정자와 함께 마을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생각하여 정자정(亭)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2. 정월 대보름, 마을의 시간을 기록하다   이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손대대로 이어져 온 정월 대보름 행사는 쉼없이 계속 이어져 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른 마을은 다 없어지고 있다 하데유”  “그래도 우리 마을은 여태것 안끊기고 계속 허고 있는겨”  “사람들이 자꾸 줄고 젊은 것들도 읎으니께 일요일에 행사를 하는겨”  참여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늘려 자손대대로 이어져 온 정월 대보름 행사를 이어가겠다는 마을 주민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대목이다. 정월 대보름 행사는 세심정에 가득찬 물을 모두 품어내고 우물 청소를 깨끗하게 한 다음에 새물로 우물을 다시 채운 다음에 풍물패의 농악놀이와 함께 고사를 지낸다 ○ 세심정 고인 물 퍼내기와 우물 청소 모습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 우물물을 퍼내고 주변 청소하는 모습)     “고여 있는 물은 퍼내고 새 물을 받아 제사를 지내야 해유”    “청소도 깨끗이 혀야쥬” 샘고사를 지내기 전에 우물물을 퍼내고 주변을 청소한 다음에 황토로 출입금지 표시를 해둔다. 샘고사를 지내기 전에 들어가면 부정 타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가면 안된다는 마을주민들 간의 약속의 표시겠지. 예전에는 금줄을 쳐놓고 황토를 깔아 출입금지 표시를 했는데 이제는 황토로만 표시한다고 한다. ○ 세심정 우물 청소후 출입 금지 표시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세심정 주변 청소후 황토로 출입금지 표시) ○ 흥겨운 풍물패 놀이와 마을 어귀 길고사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유사가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패들이 분위기를 잡는다. 전에는 풍물패가 가가호호 다니면서 쌀을 걷어 제사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마을 회관에 모두 모여 북과 장구 꽹가리를 치면서 흥을 돋고 흥에 겨운 아주머니 할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분위기를 한껏 올리니 드디어 정월대보를 행사가 진행되나 보다 싶다.   마을 어귀에 사연이 담긴 버드나무가 있는데 바로 이 나무가 서낭목으로 제일 먼저 마을 어귀의 서낭을 위하는 길고사를 지내며 3대 고사가 시작된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서낭목 앞에서 길고사 지내는 장면1) 길고사 지낼 제물을 준비하는 중에 풍물패가 분위기를 한껏 올리는 모습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서낭목 앞에서 길고사 지내는 장면2) 제물로 백설기 떡과 과일, 곶감, 대추, 밤을 준비하여 제사 준비하는 모습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서낭목 앞에서 길고사 지내는 장면3) 제사를 지낸 후 신령님 몫으로 북어와 밤, 대추, 곶감을 열십자 모양의 짚에 올림 참고로 10년전 사진(2017년 5월에 발행된 세종시 기고자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10년후와 대동소이하게 길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여 마을의 전통 문화 행사가 그대로 잘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래 사진 참조)   (출처: 세종시 기고사)  ○ 흥겨운 풍물패를 따라 세심정으로 향하다   풍물패는 한참 북과 꽹가리를 치며 분위기를 띄우다가 세심정으로 향한다. 세심정은 아침 일찍 퍼낸 물이 가득 찼고 주변은 깨끗한 채로 그대로 유지 되어 제관의 지시에 따라 제물을 준비한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 세심정 앞에서 샘고사 지내는 장면)    열십자 짚을 깔고 그 위에 떡시루를 올린다. 북어는 머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올리고 그 앞에는 밥과 미역국 그리고 밤, 대추, 곶감 과일 등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나니 제관이 앞으로 나와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동안 축을 읽는 것으로 샘고사는 진행된다. 특이한 것은 미역국 한 그릇을 우물 안으로 붓고 밤 대추도 우물 속으로 던지는 것으로 샘고사는 마무리된다. 신령님께 제물을 바치는 행사의 일부인 듯 하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 세심정 앞 샘고사에서 축을 읽는 장면) ○ 샘고사를 지내고 나면 풍물패가 마을 회관으로 이끈다   샘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고사인 집고사를 지내기 위해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정월대보름 3대 고사 중에서 마지막 고사인 거다. 여전히 풍물패는 꽹가리를 앞장세워 북치고 장구치며 징이 장단을 맞추며 마을 회관에 도착해 그 곳에서도 한바탕 흥을 최고조로 올린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  마을회관 앞에서 집고사 지내기전 풍물패가 농악놀이하는 장면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되길 빌며, 마을 주민들 모두 건강하게 무탈하게 살아가도록 신령님께 비는 의미에서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잘 타서 허공으로 올라가면 대풍년과 건강을 약속받은 것이기에 소지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 잘 타도록 조심조심하는 모습이다   마을 주민 모두 잔을 올리고 미리 준비한 금일봉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북어 대가리에 꽂아두면서 각자의 소원을 이야기 한다. 기록가인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어 한 잔 올리고 금일봉도 꽂으면서 마을 어르신들 건강과 마을의 번창을 기원했다.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 마을회관 앞에서 집고사 지내는 장면1)    (촬영: 김효섭, 일자(2026. 3. 1일), 마을회관 앞에서 집고사 지내는 장면2)  참고로 10년전 사진(2017년 5월에 발행된 세종시 기고자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10년후와 대동소이하게 집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여 마을의 전통 문화 행사가 그대로 잘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세종시 기고사) 제관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동안 축관이 축을 읽고 있는 장면   (출처: 세종시 기고사) 마을 회관 앞에서 제관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집고사를 지내는 장면   3. 정월대보름 전통의 맥을 오래 이어가길 바라며...   정월대보름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은 많기도 하고 생생하기도 하다. 유난히 크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달맞이 행사”, 논두렁 밭두렁에 불을 놓아 해충을 없애고 풍년을 기원하는 “쥐불놀이”...이 날은 동네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깡통에 불씨를 넣어 돌리며 놀이로 즐겼던 추억도 생생하다.   나무와 짚으로 만든 달집을 태우며 액운을 쫒고 복을 기원했던 “달집태우기”, 호두 밤 땅콩 등 딱딱한 것을 깨물며 튼튼한 이로 자라길 바랐던 “부럼깨기”, 아침에 일어나 동네 친구를 만나 내가 먼저 “내 더위!” 하고 외치면 다가올 여름 한철을 더위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었던 “더위팔기”, 아침에 술 한잔 마시며 귀가 밝아지기를 바라는 “귀밝기술 마시기”, 마을을 돌며 땅의 신을 달래고 복을 빌었던 “지신밟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아주 많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런 행사들이 많이 퇴색되거나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 현실 상황임에도 장군면 송문리 문성마을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갈수록 마을 주민들이 줄어들고 고령화되어 가는 상황이지만 이장님을 중심으로 노인회장님, 부녀회장님, 마을 총무님들께서 고생하신 덕에 우리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 같은 마을 전통 문화가 자손대대로 이어지길 바래 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쓸 수 있게 여러 자료를 제공해 주신 송문리 어르신 윤영욱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1) 구술 인터뷰   1) 이태하 이장님.(2026. 3. 1). 장군면 송문리 [구술 인터뷰]. 김효섭, - 송문리 정월대보름 행사내용에 대한 설명, 마을의 노인회장, 부녀회장, 남녀 총무, 문화행사 재능기부자 소개   2) 윤영욱 어르신.(2026. 3. 1일과 3. 13일), 장군면 송문리 자택 [구술 인터뷰]. 김효섭,- 과거 송문리 정월 대보름 행사 및 세심정 유래에 대한 설명, “장군면지”와 “세종시 기고사” 도서 챙겨 빌려 주심 (2) 참고 자료   1)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장군면 송문리 대표 우물에 대해 검색   2) 세종시 기고사(2017. 5. 30일 발행) 글.사진: 이필영   3) 장군면지(2014. 4. 28일 발행) 장군면지발간추진위원회 (3) 작성자 직접 촬영 사진   1) 김효섭.(2026. 3. 1). 송문리 정월대보름 행사 당일 아침 세심정 물퍼내기 및 주변 청소 장면부터 주요 3대 고사 및 풀물패 농악놀이까지 전일을 동영상 포함 촬영함   2) 김효섭.(2026. 3. 13) 송문리 세심정 관련 추가 시진 촬영  
  • 미륵댕이와 미곡1리의 시간
    [글 / 시민기록가 박숙연]   “이 소지는 이복희씨 소지올시다. 몸 건강하고 운수업 하는 아들 무사고 운전하고 운수대통하게 해 주시옵소서!” 제관 이규홍씨가 마을 연장자부터 각자의 소원이 담긴 소지를 태우며 축원을 한다. 전동면 미곡1리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흘 날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마을 안쪽에 모셔진 돌미륵부부에게 창호지와 실타래로 새 옷을 입히고 제를 올리는 미륵고사가 열린다. 모두가 한 가족 같은 마을 주민들은 만사형통을 비는 치성을 드리는데 이런 정성 덕분에 심하게 아픈 노인들도 없고 자식들도 다 잘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미륵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제례 절차 등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으나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는 안 될 마을 민속신앙으로 대대로 이어져왔다.   <미륵댕이 미륵고사> (2026.3.2.촬영) 돌미륵은 마을 주민인 윤길중씨의 증조부가 꿈속에서 연못에 빠져있는 미륵이 꺼내달라고 해서 사람들과 함께 꺼내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남근석과 여근석 그리고 아기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있으며 풍화에 의해 흐릿해진 상량문에 의하면 1839년 처음으로 미륵당이 세워졌고 1956년 전쟁과 폭풍으로 무너진 당집을 새로 지었다. 지붕은 추수가 끝난 뒤 주민들에게 추렴한 볏단으로 엮은 이엉을 얹었다. 이후 오랜 세월 잦은 수리로 약해져 2014년 전동면사무소의 지원금을 받아 개축해 지금 모습이 되었다. 이렇듯 오래도록 미륵을 모신 당이 있는 마을이라 '미륵당이' '미륵댕이'로 불리어 왔고 세종시 출범 후 도로명 주소도 미륵당길이 되었다.    <미륵당(1967)>   (출처: 2016 세종민속문화의 해 민속조사보고서 중 세종시 전동면미곡리) <미륵당(2026)> (2026. 2.13.촬영) 미륵의 얼굴에 심하게 훼손된 부분이 있는데, 미륵댕이의 위치가 이 지역의 그 유명한 6.25전쟁터 ‘개미고개’ 지척이라 얻게 된 총알 파편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 때 마을에 있던 20호 중 2채만 빼고 전체가 폭격으로 전소되었는데도 미륵님의 보살핌 덕분인지 마을 청년들이 크게 희생되지 않았다고 한다.   <훼손된 미륵 얼굴> (2026. 2.13.박숙연 촬영) <전쟁시 포격 맞은 마을(1950)> (5대째 미곡리 주민 조병일 제공) <조춘원과 기둥에 총 맞은 흔적 있는 집> (5대째 미곡리 주민 조병일 제공) 이 마을에서 5대째 살고 있는 조병일씨의 부친인 조춘원씨가 살던 집 기둥에도 이처럼 총을 맞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 이 집의 주인장 조춘원씨는 아무데나 파면 금이 나왔다는 미륵댕이에서 ‘금점하다(사금캐기)’가 큰 행운을 만난다.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미륵댕이 뒷동산 모랭이(마루) 등이 사금을 캐던 곳이었고 미곡리의 많은 사람들이 사금 캐는 일에 종사했는데 이 일을 ‘금점한다’고 표현했다. 현재 모랭이는 복숭아와 여러 채소를 키우는 밭으로 통신사 철탑이 세워진 곳이다.   “아버지(조춘원)도 사금을 일어서 먹고 살았는데 미륵댕이 말랭이에서 흙을 캐서 지게에 지고 지금 베어트리파크 앞 냇가로 일러 가는 길에 잠깐 쉬며 담뱃대를 털다가 보니께 차돌에 금이 박혀 있더래유.. 세 손가락 정도 크기 두 덩어리의 금이었는데 한꺼번에 팔지 못해서 조금씩 녹여 팔아서 딸기하우스하는 논 닷 마지기를 샀대유.” (막내아들 조병일 인터뷰, 2026.3.21) 동네 사람들은 조춘원씨가 평소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서 미륵님이 복을 준 거라고 생각했고 금덩어리 획득 사건 이후로도 조춘원씨는 금점을 해서 칠남매를 키웠다. 어느 시대에나 진리인 고마운 금으로 삶의 터전을 일군 조춘원씨가 금을 잴 때 쓰던 이 저울은 그가 금점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나쯤은 남기고 싶었을 유품이다.    <금을 재던 저울> (2026.3.21. 박숙연 촬영) ‘금 저울’이 조병일씨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면 ‘풍구’(사람이 손잡이를 돌려 내부 날개를 회전시킴으로 바람을 일으켜 곡물에 섞인 쭉정이, 겨 등 불순물을 날려 보내는 전통 농기계, 18세기부터 사용되었고 근대 이후 목재 대신 쇠 풍구가 사용됨)는 조병일씨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풍구’는 1982년 안양에서 조병일씨에게 시집온 이경애씨가 겪은 고된 시집살이를 상징하기도 한다.   <풍구> (2026.3.21. 박숙연 촬영) <결혼사진(1982년)> (2026.3.21. 박숙연 촬영) 4대째 천주교 신자인 도시여자 이경애씨에게 신앙생활은커녕 생필품 살 곳조차 마땅치 않던 시골살이는 생소했고, 방학이면 모여드는 시어머니 소생 7남매의 자녀들까지 수발해야하는 시집살이는 고됐다. 그 많은 시 조카들에게 먹일 고구마며 옥수수를 찌기 위해 아궁이에 왕겨(벼 도정 후 나오는 겉껍질로 비싼 나무 대신 쓰였다.)를 넣어 불을 뗄 때 필수품이었던,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때부터 쓰였을 이 ‘풍구’를 돌리며 연기가 매워서, 시집살이가 매워서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기름보일러를 떼면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바람을 내어 불 떼기를 도왔던 풍구는 이경애씨에게 시집살이를 떠올리게 하는 애증어린 시어머니의 유품으로 남아있었다.    "우리 마을에 3대 시어머니가 있었슈.. 내가 엣날 부터 조병일네 바로 아랫집에 사는디 그 집 시어머니가 보통은 넘었지.. 유별났지.. 며느리 잡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오는겨.. 내가 많이 들었으니께.." (동네주민 이규홍 인터뷰, 2026.3.21) 이경애씨가 조병일씨와 선을 본 날부터 결혼과 출산, 두 아들의 육아일기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추보다 매웠던 시집살이의 기록이 빛바랜 일기장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경애 일기장:도시소녀 이경애의 파란만장 농촌정착기(1982년~2000년).> (2026.3.21. 박숙연 촬영)   결혼하기 전 우연하게 양장기술을 배운 이경애씨가 시집올 때 새로 사온 재봉틀이다. 이 재봉틀로 아이들의 배냇저고리며 턱받이 등을 직접 바느질하며 태교했고 무엇보다 고단한 시집살이를 달랬다. 바느질을 하는 동안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집중할 수 있었기에 마음이 힘들 때면 재봉틀 앞으로 달려갔다.   <재봉하는 모습> (2026.3.26. 박숙연 촬영) 둘째를 낳고 시집살이가 조금 익숙해질 무렵, 오랫동안 남편 조병일씨와 하던 축산업 경기가 좋지 않아 다른 생계방법을 찾다 전의면에 양장점을 개업해 실력 발휘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시어머니 간병을 위해 양장점을 그만둔 후 경기가 다시 좋아졌을 때 운주산 아래 다시 축사를 시작했지만 IMF로 한우 값이 폭락한다. 남편은 포기하려고 했지만 평생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그만둘 순 없었다. 그렇다면 ‘축산업과 한우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키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이경애씨는 40살에 천안연암대학교 축산학과 98학번이 되고 축산 관련 여러 자격증도 땄으며 이를 바탕으로 졸업 후엔 식육점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힘든 시집살이 와중, 축산업경기가 좋을 때는 남편 조병일씨와 함께 일했고, 좋지 않을 때는 양장점으로 식육점으로 내조했다. 2014년에는 이 부부의 모든 시절, 모든 경험이 밑거름이 된 한우전문 식당 ‘운주산 한우가든’을 열어 최고의 한우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운주산 한우가든 앞에서> (2026.3.26. 박숙연 촬영) “이제 미곡리가 내 고향이지.. 내 땅 내 가게에서 직접 키운 한우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좋아하는 바느질을 하면서 보내니까 얼마나 좋아. 우리 축사에서 먹이고 키우던 소를 잡으러 보낼 때 마음이 너무 안 좋은 거야.. 그래서 항상 아들들한테 ‘소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하며 키웠어.. 그래서인지 아들들도 잘 커 주었구 젊은 사람 찾기 힘든 우리 농촌마을에 얼마 전부터 서울 살던 큰 아들 불러서 같이 일하고 손주도 자주 보고 사니까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이경애와의 인터뷰. 2026.3.21.) <가업 잇는 큰 아들과 축사에서(2016)> (2026.3.26. 박숙연 촬영) 이경애씨가 오랜 세월 생활해온 재봉실이 있는 집은 현재 천안~청주공항 복선전철 사업 구간에 포함되어 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일부 주택이 부지에 편입될 예정이며, 이경애씨의 집 또한 해당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집은 황토로 지어진 주택으로, 부부의 생업과 가족의 일상이 이어져 온 공간이다. 현재는 향후 변화 가능성을 앞두고 있으며, 주민들의 생활 환경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륵댕이와 미곡1리의 과거의 시간들을 살펴보았고 또 더 살펴볼 수도 있지만, 복잡한 상황에 처한 이 마을의 현재와 미래의 시간은 알 수가 없다. 역사는 과거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역사가 될 현재의 기록을 포함한다. 지역문화기록가로서 미곡1리의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 이상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참고자료] -구술인터뷰 이규홍. (2026.2.13.). 미륵댕이 및 미곡1리 마을에 대한 소개 [대면인터뷰]. 미곡1리 미륵당길, 미륵당. 황수경. (2026.3.2.). 미륵제 뒤풀이 때 복선전철 부지수용에 대한 상황설명 [대면인터뷰]. 미곡1리 마을회관. 조병일. (2026.3.21.). 아버지 조춘원이 금점하다 금덩어리 획득에 대한 설명, [대면인터뷰]. 미곡1리 운주산 한우가든. 이경애. (2026.3.21.). 가족 및 시집살이 이야기, 축산업의 흥망성쇠에 따른 가정 변천사[대면인터뷰](이경애의 재봉실 있는 집).
  • 연동면 옛 중심지, 그리고 부민식당
    [글 / 시민기록가 신창숙]   < 1945년 부민식당 앞에서 창업주 내외사진 > (장예숙 소장) 연동면 송용리에 위치한 부민식당은 소장자의 시모 김순례 여사가 약 1945년경 연동면 중심지(현 동세종농협 일대)에서 개업한 이후, 1976년경(인허가 기록 확인)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약 80여 년간 운영되고 있다. 당시 동세종농협이 들어서면서 기존 상권이 이동하였고, 부민식당 역시 이에 따라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는 옛 농협창고, 정미소, 면사무소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장터를 중심으로 식당과 상점이 형성되던 지역 상권 구조를 보여준다. 현재 건물은 1993년 신축된 것으로, 이후 동일한 위치에서 영업이 이어지고 있다.   < 부민식당 이전 자리로 추정되는 현 동세종농협 모습 > (촬영 : 2026-03-13) 사진의 촬영자는 확인되지 않으나, 사진 속 인물(소장자의 시부모)의 복식, 촬영 분위기, 간판 디자인 등을 종합할 때 1950~1960년대 사이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민식당이 이전 전 연동면 중심지에서 영업하였다는 기증자의 구술과도 일치한다. 해당 사진은 부민식당 초기 영업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연동면 중심 상권의 형성과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생활사 기록이다.   < 연동초등학교 제40회 동창회 현판식 사진 > (장예숙 소장) 연동초등학교 제40회 졸업(1970년) 동창회 현판은 약 1990년 전후 동창회 활동과 관련하여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부민식당은 소장자의 남편 주도로 동창회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2022년 남편 사망 이후에도 동문들의 모임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 현재 부민식당 건물 외벽에 남아있는 동창회 간판 > (촬영 : 2026-03-13) 현재는 소장자가 단독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현재는 냉면과 칼국수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 현재 연동면 부민식당 전경 > (촬영 : 2026-03-13) < 부민식당 그림 > (신창숙 그림 / 부민식당에 기증) --- [참고문헌] (1) 구술 인터뷰 장예숙, (2026. 03. 11) 연동면 내송길 12 부민식당에서 벽에 걸어 놓은 사진을 보며 얘기 나눔. [구술 인터뷰], 신창숙 장예숙, (2026. 03. 13) 촬영해 온 사진 부연 설명을 듣고자 전화로 통화함. [구술 인터뷰], 신창숙 장예숙, (2026. 03. 13) 사진과 관련한 보충 설명을 들으러 식당으로 직접 가서 이야기 나눔. [구술 인터뷰], 신창숙 (2) 개인 소장 사진 장예숙. (1945년대로 추정) 부민식당 개업초기 사진(1장) [사진]. 개인 소장. 장예숙. (1990년대로 추정) 남편의 주도로 연동초등학교 제40회 동문회 현판식 사진 [사진]. 개인 소장.  
  • 세종시의 조선시대 여성문인, 곽청창(남편 김철근 묘지명, 청창행장유사)
    [글 / 시민기록가 윤철원]  서원(청주)곽씨 청창(晴窓)은 조선 후기 여성문학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여 성해응의 「연경재전집」, 황윤석의 「이재난고」, 이재의 「도암집」, 장지연의 「대동시선, 일사유사」 등에 그녀의 행적이나 시(詩) 등이 실려 있다. 그녀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편 김철근이 별세하자 지은 「성균진사 김공묘지병 병서」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남편 사후에 행장 또는 제문을 지은 사례는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남편의 묘지명을 쓴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며 찾아보기 힘들다. 그동안 정동유가 지은 주영편에 곽청창이 지은 묘지명 전문이 실려 있었으나, 묘지석 실물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곽청창의 8대손 김석수(천안시 거주)가 「묘지석」 실물과 곽청창의 일대기를 담은 「청창행장유사」를 보관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곽청창은 1683년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으며, 김철근에게 출가한 후 서울에서 살다가 1721년 남편을 따라 전의면 관정리로 낙향하여 1761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40여 년을 전의에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1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2 > (김종식 제공) 하단 해석 참고 [성균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사진 - 한글 해석문] 곽청창이 지은 남편 김철근의 묘지명 成均館 進士 節友堂 金公 墓誌銘 幷序  公姓金諱鐵根字石心號節友堂系出光山生於戊午閏三月初五日幼而聰慧八世能成詩洛下之士莫不豓稱且事父母至孝己亥中生員辛丑抗疏明君臣之大義卒於戊申十月初四日葬於全義縣北高道朴壬坐之原初娶參議韓山李禎翊之女後娶王子師傅西原郭始徵之女卽未亡人二男一女長得性次得運出後叔父璞根一女未笄皆未亡人出也未亡人泣而叙事哀不能文嗚呼有有而有其有有有而不克有其有有而有其有常也有而不克有其有變也季世何常之常少而變之常多也公於國植綱常之節於家正百行之源而根於天性則公之有其質也待宗族以睦敎子弟以義親疎咸得其歡心鄕黨罔或有訾謫則公之有其德也有其質有其德則宜乎有是壽有是位而年僅逾五十位不得一命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是固不可測者而重爲公痛惜者也銘曰出可以樹功名處可以垂風聲而卒不彰奈何乎彼蒼  崇禎後己酉七月九日 未亡人 西原郭氏 泣血敬誌  成均館 進士 節友堂 金公 墓誌銘 幷序 (195+170=365字) 성균관 진사 절우당 김공 묘지명 병서 公 姓金 諱鐵根 字石心 號節友堂 系出光山 공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철근(鐵根), 자는 석심(石心), 호는 절우당(節友堂)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입니다. 生於戊午閏三月初五日 幼而聰慧 八世能成詩 洛下之士 莫不豓稱 且事父母至孝 무오년(1678년) 윤3월 5일에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한양(낙하)의 선비들이 아름답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한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습니다.  己亥中生員 辛丑抗疏 明君臣之大義 卒於戊申十月初四日 葬於全義縣北 高道朴 壬坐之原 기해년(17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신축년(1721년)에 상소를 올려 군신 간의 큰 의리를 밝히셨으나 무신년(1728년) 10월 4일에 돌아가시니, 전의현 북쪽 고도박 임좌(북북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습니다. 初娶 參議韓山李禎翊之女 後娶 王子師傅西原郭始徵之女 卽未亡人 첫째 부인은 참의를 지낸 한산 이씨 이정익의 딸이고, 후처는 왕자사부를 지낸 서원인(청주인) 곽시징의 딸이니 곧 미망인(본인)입니다. 二男一女 長得性 次得運 出後叔父璞根 一女未笄 皆未亡人出也 未亡人 泣而叙事哀不能文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득성(得性)입니다. 차남은 득운(得運)으로 숙부 박근(璞根)의 뒤를 이었습니다. 딸 하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며 모두 미망인의 소생입니다. 미망인이 울며 사실을 서술하려 하나 슬퍼서 능히 글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嗚呼 有有而有其有 有有而不克有其有  오호라! 가진 것이 있으면 그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인데, 가진 것이 있어도 그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有而有其有常也 有而不克有其有變也  가진 것이 있어서 그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을 상(常, 평범한 이치)이라 한다면, 가졌으나 그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변(變,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합니다. 季世 何常之常少 而變之常多也 말세에 왜 평범한 이치는 항상 적고, 변고는 항상 많은 것입니까? 公於國植綱常之節 於家正百行之源 而根於天性 則公之有其質也 공께서는 나라를 위해 강상(綱常)의 절개를 세우셨고, 집안에서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바로잡으셨으며, 천성에 뿌리를 두었으니 공은 그 바탕(質)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待宗族以睦 敎子弟以義 親疎咸得其歡心 鄕黨罔或有訾謫 則公之有其德也 종족에게는 화목으로 대하고 자제에게는 의를 가르치니, 친소 관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향당(고을)에 혹여라도 비방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은 공이 그러한 덕(德)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有其質有其德 則宜乎有是壽 有是位  이러한 바탕(質)이 있고 덕(德)이 있으면 마땅히 그에 걸맞은 장수와 지위를 누리려야 하거늘 而年僅逾五十位不得一命 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 공의 나이 겨우 쉰을 넘겼고, 관직 하나 얻지 못하셨으니, 이야말로 가진 것(바탕과 덕망)이 있어도 누리지 못한 것 아닙니까? 是固不可測者 而重爲公痛惜者也  이것이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니, 거듭 공이 애석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銘曰 새겨 가로되 出可以樹功名      세상에 나아가 공명(功名)을 세울 만하고 處可以垂風聲 물러나 머물면 풍성(風聲, 교화의 명성)이 드리울 만하건만 而卒不彰 끝내 떨치지 못하였으니 奈何乎彼蒼  어찌하리오. 저 푸른 하늘이여! 崇禎後己酉七月九日 未亡人 西原郭氏 泣血敬誌  숭정후 기유년(1729년) 7월 9일, 미망인 서원 곽씨는 피눈물로 공경히 묘지명을 씁니다.   < 청창행장유사 사진 1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2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3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4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5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6 >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 청창행장유사 사진 7 - 절우당유사> (김종식 제공) ​​​ 하단 해석 참고 [청창행장유사 - 한글해석본] - 곽청창이 75세에도 전의에서 거주하였으며 79세(1761년)에 별세하였음을 알수 있음. 西原郭孺人 行狀 吾先君子論賢婦人 亟稱孺人郭氏曰女士女士 吾立側請曰何人也 先君子曰氏出西原今 上殿下王子時 師傅 始徵女 嫁爲生員金公鐵根後配 金公與余同 爲打愚先生外孫 且孺人嘗乳我是以知之 特詳 其敬姜曺大家之流歟 又請曰 然則能文 先君子曰 文而論孺人乎哉  서원곽유인 행장  우리 선군자(先君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현명한 부인을 논하실 때마다 곽씨 부인을 ‘여사(女士), 여사’라며 거듭 칭찬하셨다. 내가 옆에 서서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여쭈니, 선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곽씨의 본관은 서원(청주)이다. 지금 임금(영조)께서 왕자 시절 사부(師傅, 스승)를 지낸 시징의 딸이다. 생원(生員) 김철근(金鐵根)에게 둘째 부인(後配)으로 출가하였다.’라고 하셨다. 김공은 나와 함께 타우선생(打愚先生)의 외손이다. 또한 유인(곽부인)은 일찍이 나에게 젖을 먹여 주셨기에 그분을 특히 잘 아는 것이다. 그분은 강씨나 조씨 가문의 훌륭한 여류문사와 같이 존경할 인물이다. 다시 “그러면 글(문장)에도 능하셨습니까?”라고 여쭈니, 선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문장으로만 그 유인을 논하겠느냐?' (글재주뿐만 아니라 덕행이 훌륭하다는 의미). 婦人業精 或以一藝名 而孺人之孔子顔子孟氏之學 體之心行之身者也 孝舅姑順夫子嚴子弟寬婢僕一遵禮儀法度森然 明於毛詩善講說 讀史論事 不論其人 論心 不論其事 爲文辭出自己 無一言蹈襲前人 嘗著四書疑問 命其子若自爲 而質陶庵先生 先生曰 見識高非吾輩可對白而還 其造詣精深如此 然善鞱晦常居若無能也  부인(婦人)의 업이 정밀하면 간혹 한 가지 재능으로 이름이 나기도 하지만, 유인(孺人)은 공자·안자·맹자의 학문을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행하였다.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치고 비복(노비)들을 너그럽게 대함에 있어, 한결같이 예의와 법도를 준수하여 엄숙하였다. 『모시(毛詩)』에 밝아 강설을 잘하셨고, 역사를 읽고 시사(時事)를 논할 때는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그 마음(본심)을 논하고, 그 일의 결과보다 그 일의 근원(동기)을 논하셨다. 문장을 지을 때는 자기에게서 우러나온 것을 써서 한 마디도 앞선 사람의 것을 답습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사서의문(四書疑問)』을 저술하고 아들에게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도암(陶庵) 선생(이재)에게 질문하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견식이 높아 우리 같은 무리가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돌려보냈다. 그 조예가 정밀하고 깊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늘 자신을 잘 감추어(韬晦) 평상시에는 마치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거처하였다. 新婦時姑試授舊牘塞戶缺孺人倒字糊以是人無知者有詩曰 海水連天濶 山花待雨開 其天機流活 然七歲作詩何足稱焉  신부 시절에 시어머니가 시험 삼아 옛 서류 뭉치를 주며 문구멍의 해진 곳을 바르라고 하셨다. 부인은 (글을 아는 것이 드러날까 봐) 일부러 글자를 거꾸로 뒤집어 발라 이로써 사람들이 (그녀가 글을 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바닷물은 하늘에 이어져 넓고, 산꽃은 비를 기다려 피어나네." 라고 하였으니, 그 타고난 재치(천기)가 살아 움직였다. 그러나 7세에 시를 지은 것만 가지고 어찌 칭찬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겠는가. 乃出孺人所爲金公墓誌命讀之其文曰 嗚呼 有有而有其有 有有而不克有其有 有而有其有常也 有而不克有其有變也 季世何常之常少 而變之常多也 公於 國植綱常之節 家正百行之源 而根於天性 則公之有其質也 對宗族而敦睦 敎子弟而義 親疏咸得其歡心 鄕黨罔或有訾謫 則公之有其德也 有其質有其德則宜乎有是壽有是位 而年菫有五十 位不得一命 此果非有而不克有其有者耶 銘曰 出可以樹功名 處可以垂風聲 而卒不彰 奈何乎彼蒼  이에 부인이 지은 김공(남편 김철근)의 묘지명을 내어 읽어보니 그 문장에 이르기를, "아아! 있어야 할 것이 있어 그 있는 것을 누리는 이가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있음에도 그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 누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常)이나,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변고(變)이다. 말세에는 어찌 정상적인 일은 이리도 적고, 비정상적인 변고는 이리도 많은가! 공은 나라를 위해 강상의 절개를 세웠고, 집안에서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바로잡았으니 이는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것이 공이 가진 '바탕(質)'이다. 일가친척에게 화목하고 자제들을 의로써 가르쳐 친소 관계를 막론하고 모두의 마음을 얻었으며, 고을 사람들 중 누구도 헐뜯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공이 가진 '덕(德)'이다. 바탕도 있고 덕도 있었으니 마땅히 장수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어야 하거늘, 나이는 겨우 쉰에 머물고 벼슬은 한 번의 명조차 얻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있음에도 그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나아가서는 공명을 세울 수 있었고, 머물러서는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나, 끝내 드러나지 못했으니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하랴!" 하였다. 吾心異識之丁丑 隨先君子南下道 出全義先君子拜于孺人 吾亦從而拜時孺人已七十五歲 猶斂膝危坐肩背聳竦燁 然有精神 壁間有四書朱子書而已 談天人性命 纚纚若不可窮 先君子出而歎曰 孺人經術益高 後四年辛巳十一月十二日壽七十九而卒 祔葬于其縣德坪負癸之原   내 마음속에 남달리 기억되는 정축년(1757년), 돌아가신 아버님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에 전의(全義)를 지나게 되었는데, 아버님께서 부인을 배알하셨다. 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절을 올렸는데, 당시 부인의 연세는 이미 75세이었다. 그런데도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곧게 앉아 계셨는데, 어깨와 등의 기세가 꼿꼿하고 정신이 형형하게 살아있었다. 벽 사이에는 오직 사서(四書)와 주자의 책들뿐이었다. 천성과 인명(人性命)에 대해 담론하시는데 그 말씀이 끊이지 않아 끝이 없을 듯하였다. 아버님께서 나오시며 감탄하시기를 “부인의 경술(經術, 유교 경전에 대한 조예)이 더욱 높아지셨구나!” 하셨다. 4년 뒤인 신사년(1761년) 11월 12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그 현(전의현) 덕평의 계좌(癸坐, 북북동향) 언덕에 (남편과) 합장하였다. 四五歲在師傅公膝上 能屬詩 尤庵先生見而奇之 命號曰晴窓 孺人之祖之欽執義 外祖靑松沈益亨 有著述可傳於後累十篇君子謂當與 女戒七篇 相表裡 生二男一女 長曰 得性 次曰得運 女適朴光冑 得運 生三男 和恊和禎和振 和禎出爲得性後 諸孫錄 孺人行謁先君子忕諾 而文不就仍以屬余 誼不敢辭謹撰次其耳聞目覩如此 盖欲徵信於立言君子也  (부인은) 4~5세 때 스승인 할아버지(사부공)의 무릎 위에서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청창(晴窓)’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부인의 할아버지는 집의(執義)를 지낸 곽지흠이며, 외할아버지는 청송 심익형이다. 후세에 전할 만한 저술이 수십 편에 달하니, 군자들은 마땅히 반소가 지은 《여계(女戒)》 7편과 서로 안팎을 이룰 만하다고 평가한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맏이는 득성이고 둘째는 득운이며, 딸은 박광주에게 시집갔다. 득운이 세 아들 화협, 화정, 화진을 낳았는데 화정이 득성의 양자로 들어갔다. 손자들이 부인의 행장(일대기)을 기록하여 나의 선친(이만성)께 묘지명을 청하고 승낙을 받았으나, 글이 완성되지 못한 채 (선친이 돌아가셔서) 나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 없어, 내가 직접 듣고 본 바를 이와 같이 삼가 엮어 쓴다. 이는 장차 글을 세우는(평가하는) 군자들에게 믿음을 얻고자 함이다.  遺事  孺人常語子性曰 汝前母之葬歲久似難動合祔於汝父親墓所 我死後汝等如欲合窆則情禮不可又須各葬於近處也  孺人長子得性平生好禮 得性不幸臨死索筆書曰老親安心 孺人正色曰死生有命吾心則安汝須安心而歸雖於倉遑號哭之際 必勑曰渠嘗好禮須一從家禮 愼毋紊亂也  유사 부인이 평소 아들 득성(得性)에게 말하기를, "네 전모(김철근의 첫 부인)의 묘소는 장사 지낸 지 오래되어 옮기기 어려우니, 네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하도록 하여라.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이 만약 (나까지) 합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정(情)과 예(禮)에 어긋나는 일이니, 마땅히 각각 근처에 따로 장사 지내야 한다." 하였다. 부인의 맏아들 득성은 평생 예법을 좋아했다. 득성이 불행히 죽음에 임박했을 때 붓을 찾아 쓰기를, "늙으신 어머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삶과 죽음에는 명(命)이 있으니 내 마음은 편안하다. 너 또한 마땅히 마음을 편히 하고 돌아가거라." 하였다. 비록 황망하게 울부짖으며 통곡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부인은 반드시 명하기를, "저 아이(득성)가 평소 예법을 좋아했으니, 반드시 《가례(家禮)》를 일체 따르고 삼가 어지럽히지 말라." 하였다. 孺人所著述先世一家墓文郭師傅遺經書箚疑女子戒訓等文甚富 一日盡焚之曰此非婦女事 恐兒輩不知宣泄於他人也  부인이 저술한 바는 선세일가 묘문, 곽사부유경서차의, 여자계훈 등 글이 매우 방대했다. 어느 날 이를 모두 불태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부녀자가 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혹여 알지 못하고 타인에게 퍼뜨릴까 두렵다." 하였다. 節友堂遺事  嘗有節日制 先聲公將觀光 其時主文人 適來見公試紙曰 吾當爲子裁之割皮封太 翌日 果有試士之命 公棄其紙不用曰 吾知其意 焉縱得第 心能安乎 尹進士志述 方就刑 公出路左握手 訣別曰 子其善歸 吾亦從此逝矣 翌日再次抗疏 明君臣之大義  절우당 유사  일찍이 절일제(節日制, 명절에 치르는 특별 과거 시험)가 있었을 때, 선성공(先聲公, 절우당)께서 장차 과거를 보러 가려 하셨다. 당시 시험을 주관하던 자가 마침 공을 찾아와 시험지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이것을 마름질(표시)해 주겠소.” 하며, 종이 겉면을 찢어 콩을 넣어 봉하였다. 과연 다음 날, 선비를 시험하라는 명(과거 실시 명령)이 있었다. 공께서는 그 시험지를 버리고 사용하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의도(부정행위)를 아노니, 설령 이렇게 해서 급제한들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셨다. 후에 윤진사 지술(尹志述)이 막 형벌을 받으러 갈 때, 공이 길 왼쪽으로 나가 그의 손을 잡고 작별하며 말하기를, “자네는 부디 잘 가게. 나 또한 이제부터 (그대의 뒤를 따라) 떠날 것이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다시 상소를 올려 군신(君臣) 사이의 큰 의리를 밝혔다.   < 생원김공 묘표 1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도암선생집 권39)   < 생원김공 묘표 2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도암선생집 권39) [생원김공 묘표 - 한글 해석문] - 김철근과 곽청창의 가족이 1721년 전의현으로 낙향하였음을 알 수 있음. 陶菴先生集卷三十九 / 墓表[二] 도암선생집권삼십구 / 묘표 生員金公墓表 (생원김공묘표) 嗚呼。此金公鐵根石心之藏也。石心先余二年戊午生。生而聰穎。八歲能詩。吾祖考議政公於公爲外從大父。嘗呼公使余同賦卽景。公應聲而對。有梨花風 a195_320c來滿院香之句。議政公歎其絶調。顧謂縡曰汝不及也。由是才名藉甚。 오호라! 이곳은 김철근(자: 석심) 공의 묘소이다. 석심은 나보다 2년 먼저인 무오년(1678년)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여덟 살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나의 조부이신 의정공께서는 공에게 외종조부가 되시는데, 일찍이 공과 나를 불러 즉흥시를 짓게 하셨다.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배꽃 바람 불어오니 온 마당에 향기 가득하네(梨花風來滿院香)"라고 하니, 의정공께서 그 절묘한 가락에 감탄하며 나(도암 이재)를 돌아보고 말씀하시길 "네가 미치지 못하겠구나" 하셨다. 이로부터 재주와 명성이 자자했다. 晩中己亥司馬。辛丑倡率館學儒生。上疏討逆臣柳鳳輝之罪。盡室歸全義之楓溪。全義卽公外祖打愚先生卜築之地。而公考主簿公諱恒壽寓居者也。 늦게 기해년(171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신축년(1721년)에는 관학(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역신 유봉휘의 죄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이후 온 가족을 데리고 전의(全義)의 풍계(楓溪, 현 관정리)로 돌아갔다. 전의는 공의 외조부인 타우 선생이 터를 잡은 곳이자 공의 부친인 주부공(휘 항수)께서 우거하시던 곳이다. ※ 유봉휘는 연잉군(영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인물임 ※ 신임사화(1721∼1722,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노론이 밀려날 때 낙향한 것임 公旣還舊廬。斷置世事。惟以書史自娛。酷愛松竹菊。扁其堂曰節友。以寓歲寒之意。吾仲父歸樂公竄扶安。公匹馬往問。仍徧遊邊山而歸。戊申十月四日感疾卒。 공은 옛집으로 돌아온 뒤 세상일을 끊고 오직 서책을 보며 스스로 즐거웠다.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몹시 사랑하여 집의 이름을 '절우(節友)'라 하였으니,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는 절개의 뜻을 담은 것이다. 나의 숙부 귀락공(李晩成)께서 부안으로 유배되셨을 때(1722년), 공은 말 한 필을 타고 찾아가 문안하고 변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무신년(1728년) 10월 4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金出光州。高麗忠臣直提學若時之後。公凡再娶。參議韓山李禎翊女無育。西原郭氏。其父王子師傅始徵。有女士譽。二男一女。長得性。次得運出爲季父後。士人朴光宙壻也。 본관은 광산으로, 고려 충신 직제학 김약시의 후손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첫 부인 한산 이씨는 자식이 없었고, 두 번째 부인 서원 곽씨는 여사(女士)의 명예가 있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득성이고, 차남 득운은 막내 숙부의 뒤를 이었으며, 사위는 박광주이다. 公天資仁孝。事親無違志。信義素孚於朋友。詬詈不及於奴僕。與人處。襟懷坦蕩。不設畦畛。喜道人之善。恥言人之過。爲文多積博發。下筆立數千言。 공은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신의가 두터웠고 종들에게도 꾸짖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탁 트여 경계가 없었으며, 남의 착한 점 말하기를 좋아하고 허물 말하기를 부끄러워했다. 글을 지을 때는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붓을 들면 단숨에 수천 마디를 써 내려갔다. 性嗜酒。遇輒引滿。遺命祭用一大椀。不問家人産業。間多絶爨而逌然也。人勸之仕則曰吾非掉頭於祿仕。士子持己如處子。但不可自求耳。 성품이 술을 즐겨 사람을 만나면 가득 들이켰으며, 제사 때는 큰 사발을 쓰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집안 살림에는 관심이 없어 때로 끼니가 끊길 정도였으나 유유자적하였다. 벼슬을 권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벼슬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비가 몸가짐을 처녀처럼 정숙히 할 뿐 스스로 구해서는 안 될 뿐이다"라고 답했다.  公爲人忼慨。最嚴於陰陽淑慝之分。語及時事。指斥無所顧忌。或至流涕。杜少陵詩不及見淸時嗚呼就窀穸者。正道公心事也。得性來乞文。略叙此而歸之。使刻于石。 공은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옳고 그름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 시국 정치를 논할 때는 거리낌 없이 비판하였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두보의 시에 '태평성대를 보지 못하고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공의 심사(心事)를 바르게 대변하는 것이다. 아들 득성이 찾아와 글을 청하기에, 이를 간략히 적어 돌려보내어 돌에 새기게 한다.   < 김철근, 곽청창 부부의 8대손(김석수), 전의 광산김씨 문중인사 등과 함께 만남 > (촬영 : 2026. 3. 23.) ​​​​​​​ --- [참고문헌] ​​​​​​​(1) 구술인터뷰   ○ 대상 : 김종식(천안향토문화연구회장) / 2026. 3. 11 / 천안시 병천면 옛날 순두부 식당       -  천안향토연구 제11집에 곽청창에 대한 연구내용을 게재하게 된 동기 청취     -  곽청창이 지은 남편 묘지명 및 청창행장유사 사진 원본(김종식 촬영) 파일을 받음.     -  곽청창의 후손과 만남을 주선하기로 약속  ○ 대상 : 김석수(김철근·곽청창 부부의 8대손) / 2026. 3. 23 / 천안시 구성동 구성식당     - 묘지명 및 청창행장유사를 보관하게 된 사연 – 선대로부터 대를 이어 보존하였음.       - 동참자 : 7명(후손 김석수, 천안향토사 김종식, 광산김씨문중 2명, 세종향토사 윤철원 등 3명)     (2) 개인 소장 사진      - 김종식(2014년) 곽청창이 지은 남편 김철근의 묘지석(청화백자 2쪽)           ⇒ 전체 글자 판독이 가능함.     - 청창행장유사 : 곽청창의 생애가 기록된 행장과 유사(앞뒤 표지 포함 10쪽) (3) 작성자 직접 촬영사진 (윤철원)      - (2026. 3. 23) 곽청창이 살았던 관정리(사관정)       - (2026. 3. 23) 곽청장의 직계 8대손 및 전의 광산김씨 문중인사와 함께 만남(천안 구성식당) (4) 지역신문 기사       - 기획 (2025. 12. 25) 문희순의 충청女지도, 대전일보 https://www.daejonilbo.com/      - 조한필 (2024. 12. 08) [조한필의 視線] 조선시대 천안의 두 여성문인, 곽청창·김부용  https://www.kukinews.com/ (5) 향토사, 지역단행본       - 책명 세종문화, 글쓴이 송길룡 「세종여성 인물사, 곽청창 편」, 세종문화원(2025)      - 책명 천안향토연구, 글쓴이 김종식 「목천출신 여류문인 , 곽청창」, 천안시동남구문화원(2024)       - 책명 주영편, 정동유(옮긴이 안대회 외) 「곽씨부인의 남편 묘지명」, ㈜휴머니스트출판그룹(2016)   (6) 학술논문       - 문희순 (2012), 호서지역 사대부가의 여성교육과 여성문인의 배출, 충남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인문학연구 · vol. 88 · 39-70  (7) 웹자료          - 한국고전종합DB, (1803) 도암선생집 권39(생원 김공 묘표) https://db.itkc.or.kr/     
  • 1970년대 부강공고 이야기
    [글 / 시민기록가 이승표]   부강공업고등학교(이하 부강공고)는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에 위치한 현 세종미래고등학교의 이전 학교명이다. 부강공고의 전신은 1958년 4월 6일에 개교한 부강상업고등학교인데, 부강공고에 대한 1966년 6월 2일의 설립 인가와 동시에 부강상업고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부강공고는 1967년 3월에 응용화학과 1학급을 설치하면서 상업고등학교에서 공업고등학교로 탈바꿈하여 개교하였고, 1990년대에는 기계과와 자동차과를 신·증설하는 등 국가와 지역사회에 필요한 유능한 기술 인력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왔다. 2012년에는 세종시출범과 함께 학교명을 세종하이텍고등학교로 변경하였고, 2022년에는 과감한 학과 개편을 추진하면서 현재의 세종미래고등학교로 바뀌었다. 2026년 현재 세종미래고등학교에 설치된 학과는 바이오화학과, 베이커리카페과, 로봇트로닉스과, 스마트기계과 등으로, 새로운 산업 수요와 학생들의 진로 희망 등을 반영한 다양하고 특색있는 맞춤형 전공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산업 인재 육성의 산실인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2026년까지 모두 16,588명이다.   < 부강공고 옛 사진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부강공고 옛 사진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1970년대 부강공고의 학교 사진첩에는 당시 학교의 문화와 학생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역 문화 기록을 위해 발굴한 이 사진첩은 학교 행정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1973년 3월 2일에 실시된 입학식 모습을 시작으로, 1979년 10월에 이루어진 학교와 기업체와의 자매결연 기념사진까지 학교의 다양한 행사 모습 등을 촬영하여 정리한 소중하고 의미있는 자료이다. 일부 사진에는 행사명과 촬영일자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첩에는 1973년도, 1977년도, 1978년도, 1979년도에 촬영된 사진이 기록되어 있고, 당시의 졸업 앨범에서도 이 사진첩과 유사한 활동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부강공고 옛 사진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부강공고 옛 사진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1973년에 ‘퇴비 증산 및 봉사활동’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학생들이 풀을 베어 학교에 마련된 퇴비장에 쌓아 올리는 모습, 삽을 들고 농수로를 보수하는 모습, 논에서 모내기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등이 담겨져있다. 같은 해 9월 15일의 사진은 ‘교련 검열 실시’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이 교련복을 입고 목총을 휴대한 채 군인들처럼 열병과 사열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교련과목이 편제되어 학생들에게 군사 교육을 받도록 했고, 교련 검열은 학교에서의 군사 교육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 부강공고 옛 사진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1977년도에 ‘거리질서 확립 시가 행렬’이라는 제목의 사진들은 학생들이 교련복을 착용하고 깃발과 목총을 들고 대열을 지어 부강 읍내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학생들을 군대식으로 편제하여 행군하는 모습도 다수 보관되어 있다. 교련 검열과 행군하는 모습은 매년 촬영한 것으로 보아 당시 고등학교에서 이루어졌던 매우 중요한 행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국기 하강식을 거행하는 모습, 학생들이 송충이를 구제하는 모습 등 다양한 발자취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한편, 1979년 10월 17일에 촬영된 여러장의 사진을 통해서는 학교(부강공고)와 기업(성신양회, 한일시멘트)간 자매결연을 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학교 교육은 학생의 개별적 성장보다는  국가가 추구하는 인간상을 기르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목표이었음을 이 사진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래는 수집한 사진첩에서 발췌한 일부 사진이다.   < 부강공고 옛 사진 - 퇴비 증산 활동 모습(1973)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부강공고 옛 사진 - 부강 읍내 행군(1973)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부강공고 옛 사진 - 교련 검열 사열(1973)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부강공고 옛 사진 - 기업체와의 자매결연(1979) > (세종미래고등학교 소장) --         <사진 출처> 세종미래고등학교. (1973~1979). 학교 행사 사진첩. 학교 소장 <참고자료> 세종미래고등학교. (2025). 2025학년도 학교 교육계획. 부강공업고등학교.(1970, 1973, 1975, 1978). 부강공업고등학교 졸업앨범
  •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염성수 옹의 회갑과 장례 기록
    [글 / 시민기록가 김미자] 빛바랜 사진 속의 주인공은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291-1번지에서 출생한 염성수(1900∼1980)옹과 그의 부인 장 씨(1902∼1980)이다. 그는 고려 말 문신 염제신(1304~1382)의 20대 후손이다. 염제신은 ‘공민왕’의 부마로서 원과 고려 양국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공민왕이 친히 그려 하사한 염제신의 초상화(보물 1097호)가 전해진다. 이번 기록은 파주 염씨 염성수 옹의 회갑 사진과 장례 사진, 족보, 그리고 후손들의 구술 증언을 종합하여 작성하였다.   < 1961년 염성수 옹 회갑연에서의 부부 사진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 1961년 회갑날 찍은 부인 장 씨의 모습 >  ​​​​​​(염세택 기증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이 사진을 누가 촬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장자(염세택, 63세)가 전동 송성리에서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사진도 함께 가져갔다. 필자의 요청에 의해 앨범 속에서 발굴되었다. 1961년 회갑을 맞은 염성수 옹은 갓과 도포를 착용하였고, 부인은 단정한 한복 차림으로 두 손을 모아 앉아 있다. 치맛자락 속에서 보이는 버선코가 잘 빚은 송편 같다. 집안 마당에 병풍을 세우고 마련한 상차림에는 고임으로 쌓은 유과와 한과, 정교하게 다듬어 올린 과일이 놓여 있어 가족들의 정성과 의례적 격식을 보여준다. 병풍에 걸린 한복은 며느리들이 손수 지어 올린 환갑 선물이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병풍 너머 흙으로 쌓은 담장이 보이고 화단엔 꽃이 진 칸나가 보인다. 아마도 송성리 1961년, 늦여름으로 보인다.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회갑은 개인의 장수를 기념하는 동시에 가문과 마을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의례였다. 높이 괴어 올린 음식은 장수와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족보에 나타난 출생 연도(1900년)를 기준으로 추정한 1961년도에 치러진 회갑은 외부에서 준비한 행사가 아닌,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마을 단위의 잔치였다. 음식 마련과 행사 준비에 주민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는 1960년대 당시 공동체적 생활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사진은 전통 유교 의례가 근대기 일상 속에서 어떻게 지속·변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생활사적 자료이다.   < 1981년 염성수 옹의 장례식에서 제를 올리는 상주들 >  ​​​​​​(​염세택 기증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이어지는 염성수 옹의 장례 사진에는 흰 상복과 두건을 착용한 상주들과 마을 사람들이 묘소 앞에서 제례를 올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도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으로 바뀌었다. 멍석 위에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 장면, 학이 그려진 장식기와 조등, 소박한 제기는 오늘날 장례식장 중심의 장례 문화와 다른 전통 장례의 면모를 보여준다. 장례는 전문화된 절차라기보다 남은 사람들이 함께 고인의 삶을 정리하는 공동의 의례였다.    < 1981년 조문객과 인사하는 상주들 >  ​​​​​​(​염세택 기증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 장례를 치른 후 산소에 제사를 지내는 가족들 >  ​​​​​​(​염세택 기증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산소에 잔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장례를 치른 직후 제사를 지내는 모습으로 보인다.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들도 함께 서 있었는데 이는 고인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족보에는 염성수 옹이 돌아가신 연도가 1941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시대를 살았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염성수 옹은 생존해 있었다고 구술했다.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막내딸(염옥순, 87세)의 구술에도 염성수 옹이 돌아가신 날짜는 1981년 8월 9일이었다. 이는 문헌 기록과 구술 기억이 어긋나는 사례이다. 구술은 생활 경험에 기반한 기억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가 되지만,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조와 수정이 필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사례는 기록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다양한 자료의 비교 속에서 보완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 족보, 파주 염씨 대동보 권2 > (염순택 기증 / 촬영 : 2026-02-26)   < 족보, 파주 염씨 대동보 권2, 菊坡公派(국파공파) 25세 諱 德恒系(덕항계) 부분 > (염순택 기증 / 촬영 : 2026-02-26) 족보에는 염성수 옹의 사망한 날짜가 1941년으로 되었으나 막내딸의 구술에 의하면 1981년 8월 9일이다.  염성수 옹의 회갑과 장례 사진은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생활사를 증언하는 자료이다. 회갑 사진이 삶의 충만함과 축원의 장면이라면, 장례 사진은 공동체가 한 생을 정중히 마무리하는 애도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지역 사회의 생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며, 후손들에게 선대의 삶의 방식을 전하는 매개가 된다. 따라서 1960년대 회갑연과 1980년대 장례 사진을 토대로 작성한 이번 기록은 한 사람의 행적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록과 기억이 상호 보완되어 형성되는 마을사 성격을 드러낸다. 마을의 역사는 연대기적 사실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체험, 구술, 그리고 이를 증언하는 생활 자료들이 함께 엮이며 형성된다. 사진 한 장, 기억 하나, 기록 한 줄은 지나간 시대를 대조하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자료를 수집·정리하는 마을문화기록가는 과거 공동체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 주는 중요한 매개자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1) 구술 인터뷰 염세택. (2026. 02. 06). 전동면 송성리 291-1번지에서 출생한 염성수 옹 회갑사진 관련해서 전화로 통화함. [구술 인터뷰]. 김미자. 염세택. (2026. 02. 09). 전동면 송성리 염성수 옹의 회갑 및 장례 사진을 카톡으로 받았으며 생몰 연대 관련해서 전화로 통화함. [구술 인터뷰]. 김미자. 염순택. (2026. 02. 17). 전동면 송성리 염성수 옹 회갑 사진을 보여주며 누구 회갑인지 확인하고 족보 사진을 이미지 파일로 받음. [구술 인터뷰]. 김미자. 박옥순. (2026. 02. 19) 염성수 옹의 막내딸(염옥순, 서울거주, 87세)에게 돌아가신 날짜를 전화로 확인함[구술 인터뷰].  김미자. 염세택. (2026. 02. 23) 염성수 옹의 손녀 집에서 사진 관련해서 종합적인 내용을 확인받고 사진 원본을 전달 받음[구술 인터뷰]. 김미자, 세종시 전의면 염세택의 누나(염영임) 가정집 (2) 개인 소장 사진·자료 염세택. (1961). 회갑날 부부가 찍은 사진(1장)과 부인 장 씨 사진(1장) [사진]. 개인 소장(기증). 염세택. (1982). 장례식 사진(3장) [사진]. 개인 소장(기증).  염순택. 파주 염씨 족보(2장) [사진]. 개인 소장(기증).   
  • 지금은 사라진 당암초등학교를 떠올리며
    [글 / 시민기록가 이승표] 당암초등학교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조성 이전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에 위치했던 초등학교이다. 당암리는 현재 세종시 새롬동, 나성동 일대로, 2012년 세종시 출범에 따라 행정구역이 변경되며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학교가 있던 위치는 현재 세종시 새롬동 126-2번지로, 지금은 새뜸마을 14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68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72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당암초등학교는 폐교된 학교로, 관련 기록 역시 점차 확인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1964년에 제작된 당암초등학교(당시 당암국민학교) 제13회 졸업앨범을 비롯하며 몇몇 졸업앨범이 개인 소장 자료로 확인되었다. 이 자료는 당시 학교생활의 일부를 살펴보고 관련 기록의 존재를 확인할뿐만 아니라 당시 학교생활과 마을의 분위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세종시의 기록이다. 당암초등학교는 1946년 11월 19일 장기국민학교 당암분교로 개교하여 2008년까지 운영되었다. 세종지역의 과거 마을 이름인 나성, 송원, 당암, 제천 등 인근 마을 학생들이 이 학교에 재학하였으며, 총 졸업생 수는 3,093명으로 확인된다. 요즘의 학교와 달리 1960년대의 학교는 마을과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공간으로, 지역 주민과 생활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으며, 당시 농촌 지역에서 교육과 공동체 활동이 결합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종시 출범을 거치며 기존 마을과 학구가 해체되면서, 학교 역시 통폐합되었는데, 이때 당암초등학교도 폐교되었다. 2008년 1월 26일 제57회 졸업식을 끝으로 같은 해 2월 28일 폐교되었으며, 인근 장기초등학교와 통합되었다.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1964년도에 만들어진 당암초등학교 제13회 졸업 앨범에는 당시 학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학생들의 개인 사진과 단체 사진을 통해 당시의 학교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앨범은 송원, 제천, 당암, 라성 등 마을별 단체 사진을 수록하여 추억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마을별로 살고 있는 학생들을 앨범 사진에 담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시민기록가의 입장에서 앨범을 만드신 분들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또한, 수예부, 습자부, 짓기부, 음악부, 그림부, 수판부, 공작부 등 특별활동 부서별 단체 사진도 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수판(주산) 교육이 당시에 중요한 교육활동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당암초등학교 1964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 당암초등학교 1972년 졸업앨범 > (소장 : 허만성) 앨범에 나타난 운동회의 모습은 매우 다양한 활동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운동회에서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기마전, 굴레벗기, 곤봉놀이, 눌고 넘어서기, 기둥쌓기, 볏단쌓기 등을 겨루었을 것이다. 시골학교에서의 대부분의 가을 운동회는 동네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으므로, 당암초등학교 학구의 동네 주민들이 함께 모여 행복한 축제를 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도 수학여행 장면과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와 관련된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앨범의 주인공인 당암초등학교 제13회 졸업생들은 현재 고희를 넘긴 연령대로, 지금은 어찌들 살아가시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참고문헌] - 자료 소장자 허만성. (1964). 당암초등학교 졸업 앨범. 개인 소장. - 인터넷기사 김영록. (2008.2.17.). 공주 당암초 마지막 졸업식. 충청신문. 홍근진. (2016.9.13.). 세종시 ‘당암초’ 역사속으로 사라져. 아시아뉴스통신.  
  • '계유정난' 속에 세종시 출신 인물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요즘 흥행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권력의 긴장과 인물 간의 갈등은 익숙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영화 속 대립과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장면들은 긴장감을 높이고, 끝내 마지막 순간에 놓인 인물들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며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2026) 스틸컷 (출처 : 쇼박스) 그런데 이런 역사 속의 사건에도 세종시와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인물들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2026) 스틸컷 (출처 :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시대 단종과 계유정난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1453년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초기의 핵심 인물들이 제거되거나 이후 복위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종서, 박팽년, 성삼문은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입니다. 김종서는 조선 초기 문신이자 군사 전략가로, 세종대왕 시기 육진 개척을 통해 북방 영토 확장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고려사절요』와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며 정치와 학문 양쪽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 김종서 초상 > (출처 : 순천김씨종친회 홈페이지) 현재 그의 묘는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공주에 속해 있었으나 세종시 출범 이후 편입되었습니다. 묘역은 지금 역사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이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는 수양대군 측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와 같은 시기, 같은 주제를 다루는 영화 <관상>에서는 김종서에 대하여 강단 있는 인물로 표현합니다. 관상가가 그의 얼굴을 보고 ‘호랑이의 상’이라고 묘사하는데, 실제 그의 행적을 떠올리면 과장만은 아닌 표현으로 보입니다.   영화 <관상>(2013) 포스터 - 김종서 (출처 : 쇼박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계유정난 이후에도 복위 시도를 이어가다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집현전 부수찬 박팽년이 상언하기를, " … (중략) … 지금 아비가 상을 당하여 전의현에 여막을 짓고 있고, 신의 어미도 따라가 있는데 또 병이 있사오니, 멀리 떠나서 벼슬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 (중략) … 신의 직책을 면하게 하여 구구한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86권, 세종 21년 9월 27일 임신 2번째기사) * 당시 박팽년은 24살(만22세)이었다.    세종과의 연결은 그의 가계를 통해 확인됩니다. 조부 박안생의 묘가 전동에 있고, 부친이 전의에서 여묘살이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를 보면 전의 지역에 선산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박팽년은 옥사 이후 시신이 온전히 수습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삼문 역시 사육신 중 한 명으로,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된 인물입니다.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사우인 ‘문절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성삼문의 영정과 유품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장소로, 지역에서 그의 충절을 기리는 중요한 기록 공간입니다.   < 금남 문절사 > (출처 : 국가유산포털) 계유정난 이후 그의 가문 역시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재산과 토지 역시 몰수되었습니다. 문절사는 이러한 역사적 비극 이후에도 기억을 이어가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김처선은 계유정난 당시에는 생존해 있던 인물이지만, 사건과 관련하여 주요한 역할을 하거나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연산군 시기 직언을 하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전의김씨의 시조로, 세종시 전의면 일대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직언한 결과, 가문 자체가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전의김씨는 철폐되고 관련 기록과 흔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며, 심지어 ‘처(處)’라는 글씨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종종 과장되거나 재구성되지만, 그들이 실제로 남긴 흔적은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세종시는 행정수도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와 인물의 기록이 축적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김종서의 묘역과 성삼문의 문절사, 전의 지역에 전해지는 박팽년 가문의 흔적, 그리고 김처선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렇게 살펴보면 계유정난과 관련된 인물들이 세종 지역과도 꽤 이어져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2026) 스틸컷 (출처 : 쇼박스) 영화는 이야기에 흥미를 더하고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해주지만, 그 과정에서 일부 내용은 각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지점에서 기록은 사건을 다시 확인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참고문헌] - 일반 문헌 대전세종연구원. (2022). 세종인물여행. 경성문화사. 박팽년 편찬위원회. (2015). 세종향토문화 9집 세종시 사육신 박팽년. 세종문화원, 세종향토사연구소. - 인터넷 자료 국가유산포털. (미상). 금남 문절사 전경. https://www.heritage.go.kr/ 국사편찬위원회. (n.d.). 세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MonthList.do?id=kda 쇼박스 홈페이지. (2013). 영화 <관상> 포스터 [사진]. https://showbox.co.kr/forums/QTICGEN7K/threads/T3T53DPLN 쇼박스 홈페이지. (2026).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 https://showbox.co.kr/forums/QTICGEN7K/threads/T4FJ9YL3V
  • 2026년 세종시 추천 전시 - 학교에서 찾은 우리 마을 옛날 모습, 《연기학교, 세종학교》
    < 전의공립보통학교 가을대운동회, 1941, 전의초등학교 소장 > 현재 전의면에 위치한 전의초등학교의 일제강점기 시절.   전시 《연기학교, 세종학교》는 마을기록문화관에서 세종시의 오래된 학교를 돌아보며 찾을 수 있었던 기록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 지금은 사라진 마을의 문화나 분위기를 다시 느껴보는 아카이브 전시입니다.    학교는 오랫동안 마을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고, 일상의 질서와 흐름을 만들어온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즉, 학교의 기록은 곧 마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가 세워지고, 옮겨지고, 때로는 이름이 바뀌기도 했지만 매년 그곳에서 반복된 일상이 모여 한국 교육의 역사가 되고, 우리가 살아온 마을을 만들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한국전쟁을 지나, 근현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세종시 지역에 남아있는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때 당시의 공기와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시절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무언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아주 생경하게 다가온다는 사실도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남기고 있는 기록 또한 미래 세대에게 현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내는 기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시 관련 정보]  ○ 전시기간 : 2025년 12월 30일(화) - 2026년 6월 22일(금)    ※ 오전 9시 - 오후 6시 운영 / 주말 및 공휴일 휴무  ○ 전시장소 : 마을기록문화관(연동면 내송길 20)  ○ 입 장 료 : 무료 ○ 문 의 처 : 044-300-3155 / jh2512@korea.kr - 세종특별자치시 자치행정과 기록공개팀   ※ 단체 견학 및 도슨트 신청 희망자는 문의처로 사전 협의 부탁드립니다.   특히 우리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주민들에게는 마을의 과거를 구체적인 기록으로 확인하고 서로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합니다. 학교 기록을 중심으로 한 전시는 지역사 이해의 출발점이자, 주민 활동과 자치의 맥락을 돌아보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 단체견학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기 적합합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추상적인 설명이 아닌, 실제 기록을 통해 우리 마을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학습 경험을 제공합니다. 관람 대상과 목적에 따라 전시 내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도슨트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으니, 단체견학이나 교육 연계를 희망하시는 경우 편하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명동국민학교 정문, 1977, 명동초등학교 소장 > 정문을 새로 짓고 촬영한 사진. 충성, 효도, 멸공이라는 구호는 당시대의 모범적인 이상향으로 일상에서 아주 흔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1960년대 세종시의 모습은? 연기군 갈운3리의 마을공동체 기록
    글 / 아카이브 담당자 및 마을기록문화관 실습봉사자(주영재, 장윤지, 박신영, 조성윤, 변진호, 박장연) 9월, 수확을 앞둔 들녘은 한 해 농사의 결과를 기다리는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시기입니다. 세종시가 출범하기 이전 연기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신도심으로 새롭게 조성된 세종시 남면 일대 역시 예전에는 논과 밭이 펼쳐진 농촌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은 도시 개발로 바뀌어, 그 흔적을 직접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돌아보고자 하는 곳은 옛 갈운3리입니다. 갈운3리는 세종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에 속하였으며, 현재 세종충남대학교병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옛 갈운리 지역입니다. 갈운(葛雲)이라는 지명 자체는 조선시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옵니다. 산이 칡넝쿨처럼 얽히고 물이 귀해 구름을 보아도 물을 보는 듯 반가웠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고(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로 갈운3리는 ‘창촌’ 또는 ‘창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창고(사창, 社倉)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조치원문화원, 2004).    < 오늘날의 지도에서 찾아본 옛 갈운3리의 위치 >​​​​ 갈운3리는 정부 지원 체계가 정착되기 이전부터 주민 스스로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하여 마을단위의 공동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당시 갈운3리에 살았던 전영식 씨에 따르면, 이 지역은 과수원과 한우 사육 농가가 예전부터 많았던 농촌으로, 인근 마을보다 새로운 농사법이나 사업 구상·육성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연기군으로 돌아온 뒤 여러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덕분에 서울에서 접한 새로운 농사법이나 사업운영방식을 인근 마을보다 비교적 일찍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   < 기증기록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전영식 선생님 > (촬영 : 2025-08-05)   “ … 그때만 해도 거기(서울 봉천동)가 도시가 아니고 완전 산골이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온상농사를 하더라고. 고구마, 고추.  그걸 보고서는 아 이것도 괜찮겠다 싶어가지고  (연기군으로 돌아와서) 고추 온상육묘를 시작했어.   … (중략) … 시골에서는 그런 걸 모르니까 내가 보고와서는 시작한거지.  … ” (개인인터뷰, 2025년 8월 5일) 남면에서 소 사육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1970년대 토마토 하우스 농사의 성공과 그 이후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전영식씨는 고추 재배로 시작해 토마토 하우스 농사를 도입했고, 마을의 70%가 이를 따라 하면서 갈운리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점차 김해 등 남부 지역보다 수확이 늦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이 들자, 다시 시도했던 것이 젖소 초유떼기 송아지 사육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청주 등지에서 일주일 된 송아지를 사와 1년 이상 길러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수익성이 높았기에 이후 이 방식이 마을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렇게 집집마다 송아지를 키우며 마을 전반의 경제적인 안정에도 기여했습니다.   < 당시 마을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명부 > (촬영 : 2025-08-05) 반장들의 이름 중 하나에는 전영식 선생님의 이름도 보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갈운3리 마을주민들은 개별적으로 공동자금을 모아 마을의 공동사업을 하거나 곡식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당시 그러한 내용을 기록하였던 공동체의 관리문서를 전영식씨가 마을기록문화관으로 기증해주셨습니다. 기증받은 자료들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약 30여 년간 마을에서 작성된 장부, 규약, 명부류입니다. 여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자금을 모으거나 곡식을 빌려주고 갚은 내용에 대해 기록해놓는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 기록물은 작성 시기의 경제 상황과 사회적 관계망 등을 보여주기에 당시 시대적 맥락과 함께 주민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 기록물이 나오게 된 배경에대해 전영식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 기증기록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전영식 선생님 > (촬영 : 2025-08-05)   “ … 옛날에 64년도면은 지금부터 60년 전이거든요.  60년 전인데, 그땐 농촌 경제가 되게 어려웠거든.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서  ‘야, 이건 이렇게 해서 될 것이 아니라,  자체 자금을 만들어 보자.’ 그래가지고서 … ” (개인인터뷰, 2025년 8월 5일) 이렇게 이장님을 중심으로 마을주민들이 사랑방에 모여 자체적으로 규약과 대장을 만들어 관리했고, 모아진 자금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 창촌부락(갈운3리) 자체자금 설립 및 관리규약(1964)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1. 창촌부락(갈운3리) 자체자금 설립 및 관리규약(1964)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마을 공동기금을 마련·운영하기 위해 제정한 규약 문서다. ‘자체 자금’은 주민들이 회비·찬조금·수익을 모아 공동사업, 경조사, 긴급 자금 등에 사용한 재정으로, 목적·재원 조성·집행 절차·회계 보고 등이 규정되어 있다. 후반부의 ‘부(部) 기록자금 차용부서’에는 특정 부서가 자금을 빌리고 상환한 내역이 곡종, 수량, 기간, 이자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 갈운3리(창촌) 거출곡 대장(1964-1975)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2. 갈운3리(창촌) 거출곡 대장(1964-1975)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마을이 공동 목적을 위해 곡물을 거둔 내역을 기록한 장부다. 거출곡은 주로 모임 식비나 전기사업 자금으로 쓰였으며, 마을회관 건립 후 남은 자금은 환급되었다. 반별(1·2·3·5반)로 성명, 경작지 면적, 거출 수량·목표량, 곡종, 도장이 기재되었고, 일부는 자발적 증량·감량 사례가 확인된다. 말기에는 식비·계산식·수입 기록 등이 혼재한다.    “그때만 해도 은행이 없었어.  나중에는 농협도 생기고 그랬는데  농협도 50년 조금 넘었는데 우리는 60년이 넘었잖아.  우리가 먼저 시작을 한 거지.” (개인인터뷰, 2025년 8월 5일)   < 갈운3리(창촌) 부락자금 관리대장(1964-1988)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3. 갈운3리(창촌) 부락자금 관리대장(1964-1988)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부락 공동자금의 적립, 곡물 대여·상환 내역을 기록한 장부다. 초기에는 거출 명세와 반별 명부가, 이후에는 차주의 성명, 대여·상환 날짜, 곡종, 수량, 보증 도장 등이 기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표 형식과 날인이 단순화되었고, 1987년 이후에는 회계결산서, 공동기금 합의서, 회의록, 마을회관·전화 설치 사업 기록 등이 포함되었다.    < 갈운3리(창촌) 반계 관리 명부(1970년대)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4. 갈운3리(창촌) 반계 관리 명부(1970년대)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마을의 1~4반 계원과 회차별 납부 현황을 기록한 명부다. ‘호당 1두(斗)’ 등 곡물 단위의 납부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현물 경제의 흔적을 보여준다. 수계·수금계·수봉계 등 다양한 전통 계 조직이 확인되며, 모금된 자금은 하수구 수리, 도로 확장 등 공동사업에 사용되었다. 정부 지원이 시작된 1991년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다.    < 갈운3리 마을회관 찬조지원금 명부(1991)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5. 갈운3리 마을회관 찬조지원금 명부(1991)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마을회관 건립을 위해 각 단체·개인의 현금·현물 기부 내역을 기록한 명부다. 기부자 성명, 금액, 날짜, 물품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경로잔치 비용, 적환장 설치비, 건축비 결산 등 회관 준공과 관련한 재정 운영 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 갈운3리 경로당 건립 개인 찬조 명부(1991) >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6. 갈운3리 경로당 건립 개인 찬조 명부(1991)  ► 기록물 열람 바로가기 경로당 건립을 위해 개인이 기부한 금액과 명단을 기록했다. 동계, 청년계(번영회), 축산계, 부녀회, 조축계 등 소속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일부 명단에는 가족 관계(누구의 처·모)가 함께 표기되었다. 기부 금액은 2만 원대부터 30만 원대까지 다양하다. --   < 전영식 선생님 > (촬영 : 2025-08-05) 이처럼 갈운3리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일상적이고 꼼꼼히 남겨진 기록들은 한 마을의 재정 운영과 공동체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기록은 당대 주민들이 협력과 자율을 바탕으로 마을을 꾸려 나갔던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정부가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이전의 농촌 재정이 자립하던 방식, 현물 경제의 흔적, 전통 계 조직의 운영 등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지역사 연구와 생활사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공식 행정문서가 포착하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을 보여줄뿐만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는 중요한 문화자원이기 때문에 마을기록문화관은 이 자료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서비스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기증받은 기록물 자체만이 아니라 구술기록(인터뷰)을 함께 생산하여 문헌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의 결락을 보완하고 기록물을 디지털화하여 보존하였기 때문에, 종이 문서와 기억 속에만 머물던 마을의 역사와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경험을 세대를 넘어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자료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남면 갈운3리.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조치원문화원. (2004). 남면향토지. 조치원문화원. 한정수, 김재광. (연도미상). 연기군. in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10.  인터뷰 전영식. (2025년 8월 5일). 대면 인터뷰. 담당자(장재훈)와의 대면 인터뷰. 세종시 조치원읍.
  • 마을이 여름을 보내던 강가의 부강수영장
    세종시 부강면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가 있습니다. 바로 강가에 자연적으로 펼쳐졌던 모래사장으로 인해 만들어진 ‘부강수영장’ 이야기입니다.    < 부강면을 흐르는 금강 > 대청호에서 내려오는 금강과 대전에서 내려온 갑천이 합류하여 수량이 풍성해진 강물은 노호리와 금호리를 감아도는 S자 모양을 형성합니다. 강이 크게 굽이치다보니 커브마다 자연스럽게 모래가 퇴적되었고, 강의 양쪽(부강면 금호리-금남면 부용리) 모두 백사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 1958년 '부강수영장' > (출처 : 『부용이야기』) 바닷가가 아닌 곳에 생겨난 모래사장은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사람들을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대전, 천안, 청주, 조치원 등지에서 기차를 타고 부강역에 내려 백사장을 찾는 인파는 주말마다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신혼여행지로 이곳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 1970년대 금강 백사장 > (출처 : 『부용이야기』) 모래사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점은 1900년경의 대홍수와 1946년 ‘병술년 대홍수’로 인한 지형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00년 무렵, 당시 부강포구는 강 상류로까지 선박 운항이 가능한 구간이었으며 가항종점(可航終點)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이후 강 상류로 이어지는 수로에 토사가 쌓이며 수심이 얕아졌고, 그 결과 부강포구는 가항종점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 1969년 금강 백사장에서 찍은 소풍 사진 > (출처 : 『부강면지』) < 1970년대 금강 백사장 > (출처 : 『부강면지』)   < 1977년 '부강수영장' > (출처 : 『부강면지』) 곽창록 부강향토연구회장에 따르면 이때의 홍수는 지형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금강 본류와 별개로 흐르던 지천이 사라지고 금강 본류는 서쪽으로 밀려 이동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부강포구에는 대량의 모래가 퇴적되어 대형 선박의 접근이 어려워졌고, ‘구들기’에 있던 장터 역시 침수되어 지금의 부강장 자리로 이전하게 됩니다(김성식, 2024. 11. 28.).   < 부강면지 > (마을기록문화관 소장) 부강면지(2015)에도 당시의 대홍수로 인해 부강면 금호리의 생활환경이 크게 바뀌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원래 50호 정도의 검시(마을이름. 평짓말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금호1리를 말함)는 금강 근처의 아래쪽에 위치했는데, 홍수가 나며 마을의 대부분이 물속에 잠겼기 때문에 상류쪽으로 이주하여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이곳 강은 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맑아 물고기도 잘 잡히고, 바위 밑에는 다슬기도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생선을 구입해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 1962년 8월 '부강수영장' > (출처 : 『부용이야기』) 이 일대에는 마을 간 교류를 위한 나루터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량이 적어 배가 떠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교통수단이자 화물운송수단으로 나루터가 활발히 운영되었습니다. 부강면 금호2리(당시 청원군 부용면)와 금남면 부용1리의 왕래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선말나루와 빙이나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외에도 나루터는 몇 군데 더 있었지만 그 위치가 수시로 바뀌어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기는 힘듭니다. 이 지역은 홍수가 발생하면 지형이 쉽게 바뀌어 뱃길과 나루터 위치가 일정치 않았고 지명이 가리키는 위치도 포구의 이동과 함께 변화하였기 때문에 나루터 지명도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강창숙, 연도 미상). 이 아름답고 다채로운 강변 풍경은 1980년대 초 골재 채취가 본격화되면서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부선 철도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갈과 모래가 이 지역에서 대규모로 채취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 수영장과 백사장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 부용가교 > (출처 : 메트로세종 / 최준호, 2024. 8. 26.)   < 부용가교 > (출처 : 메트로세종 / 최준호, 2024. 8. 26.) 당시 민간업체 ‘금호골재’는 골재를 채취하기 위하여 임시로 가교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부용가교(부강면 부강리 1320)’입니다. 채취가 끝난 후, 그 쓰임을 다하고도 시민들의 이동통로로 활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가교를 보수하여 유지관리하고 있습니다. 집중호우로 인해 파손이 되면 매번 복구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최근에는 가교를 유지보수하는데 지속적으로 예산이 투입되기에 인근에 다리를 정식으로 건설할 예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2022년 집중 호우로 인해 파손된 부용가교 > (출처 : 메트로세종 / 최준호, 2024. 8. 26.) 오늘날 그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부강의 수영장과 강변 백사장은 한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졌던 장소였습니다. 이런 곳이 우리 세종시 주변에 있었나 싶을 정도의 당시 기록들을 하나씩 찾아내다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또한 기록할 수 있을 때 잘 기록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 [참고문헌] (도서) 오선영, 김정희(글), 이규상, 장호수(발행). (2010). 부용이야기. 부용면,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5). 부강면지. 부강면지발간위원회. (신문기사) 김성식. (2024.11.28.). 발로 쓰는 금강별곡 - 37. 세종 부강은 금강의 핫플이었다 [기사]. 중부매일. https://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9736. (마지막 확인일 : 2025-7-30) 최준호. (2024.8.26.). 해마다 '피해→복구' 반복되는 세종시 금강의 '임시다리' [기사]. 메트로세종. http://www.metrosejo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 (마지막 확인일 : 2025-7-30) (인터넷) 강창숙. (연도 미상). “부용나루”. 디지털세종문화대전. https://sejong.grandculture.net/sejong/toc/GC07700260. (마지막 확인일 : 2025-7-30)  
  • 연기군의 기억(1) : 연기군청 따라걷기
    우리는 지금 세종시에 살고 있기에 이 지역의 옛 이름인 ‘연기군’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보람동에 자리잡은 세종시청이 있기 전에 연기군청은 조치원읍에 있었고, 그 사실조차 청사 이전 10년이 넘어가는 오늘날 흐릿한 기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기군청은 언제부터 그곳에 자리했으며, 그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질문 하나에서 시작해, 우리는 연기군의 발자취를 따라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고 합니다. 비교적 가장 최근인 조치원읍에 있던 연기군청부터 돌아보겠습니다. 1. 연기군청, 조치원읍 시절 (1911~2012) 1911년, 연기군청은 연기면 연기리에서 조치원면(현 조치원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시점부터 세종시가 출범하는 2012년 6월 30일까지 약 100년간, 조치원읍은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연기군청이 조치원으로 옮겨온 이후 청사의 위치는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1) 1911-1957년 : 교리26번지 (현재 조치원읍 으뜸길 248 한신더휴 아파트 일대) - 조치원역 건너편 현 한신더휴 아파트 일대(조치원읍 으뜸길 248)는 일제강점기 시절 연기군청 소재지였습니다(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1947년부터 1988년까지는 이 지역의 지명이 '교동'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곳에서 근무하였던 주민들의 기억에는 교동 청사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1911년 일제강점기 시절 연기군청 > (사진 : 최석로, 1992, p.118) 일제강점기 시절 조치원에 있던 연기군청 (2) 1957-1985년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에 신축 이전 - 1958년 군청이 들어서면서 군청을 중심으로 여러 관공서들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으로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 소속 공무원들은 주변의 침산리나 서창리에 주로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1985년에 군청이 신흥리로 이전하면서, 이 곳의 건물은 조치원읍사무소로 활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이 곳에 북세종통합행정복지센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로 신축 이전한 연기군청(1957-1985) > (사진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 새내16길 17(교리 9-1번지)로 신축 이전한 연기군청(1957-1985) > (사진 출처 : 세종문화원, 2016, p.35) - 참고로 1985년에 조치원읍사무소가 이 곳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조치원읍사무소는 1928년부터 교리23-13 일원, 우체국 뒤편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피폭되어 1957년에 신축하였습니다.(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아래 사진은 1957년 촬영된 조치원읍사무소의 낙성식 사진이며, 현재 계룡아파트 부지(새내로143)입니다.   < 계룡아파트 부지(새내로143)에 있던 조치원읍사무소 신축 낙성식 > (사진 : 세종문화원, 2016, p.35) (3) 1985-2012년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 - 1985년에 신흥리에 신축된 청사는 연기군청으로 사용되었으며(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p.560),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후에는 약 3년간 임시 세종시청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한 연기군청(1985-2012)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 신흥리 123번지로 이전한 연기군청(1985-2012) - 2003년 촬영 사진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이후 2015년, 보람동 청사가 완공되면서 시청은 보람동으로 이전되었고, 현재까지 세종시청 본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보람동 세종시청 청사 건축 과정(2014년) > (출처 : 세종스토리(세종시 공식 블로그)) 그렇다면 조치원읍으로 오기 전에는 연기군청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름이 '연기군청'이긴 했을까요? 2. 연기면 연기리 시절 (1895~1911) 1895년, 조선은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연기현’을 ‘연기군’으로 승격시킵니다. 이때 군청 소재지는 연기면 연기리였습니다. 현 연기리 425-19 부지가 연기군청으로 쓰이는 곳이었으며, 1911년 조치원으로 이전한 뒤에는 1914년부터 1955년까지 남면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pp.199-204 /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p.2-13)   < 현재 연기면 연기리 425-18 부지 > (촬영 : 25-03-21) 1896년, 다시 칙령 제36호에 따라 연기군은 충청남도에 소속되었고,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의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은 조치원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후 1914년에는 인접한 전의군이 연기군에 통합되며, 행정구역이 확대되고 조치원이 연기군의 실질적인 중심이 됩니다. 3. 그 이전, 연기현과 전의현 시대 ( ~1895) 연기군의 뿌리는 조선시대의 ‘연기현’과 ‘전의현’에 닿아 있습니다.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1413년,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지방행정을 정비했습니다. 1414년, 연기현과 전의현은 한때 ‘전기현(全畿縣)’이라는 이름으로 병합되었다가, 1416년 백성들의 반발로 다시 분리되었습니다. 이때 전의현은 ‘전성현’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두 현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각각 운영되었고, 1895년 연기군과 전의군으로 승격되며 다시 행정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1895년 이후의 연기군 기록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다음 기회에 콘텐츠로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 흩어진 마을의 흔적 조선시대는 물론, 그 이전의 고려시대, 삼국시대에도 이 곳에는 사람들이 살아왔고, 끊임없이 수많은 변화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금남면과 대평동 일대는 본래 공주군에 속해 있다가 연기군에 편입되었고, 소정면·전의면·전동면은 과거 전의군의 관할이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일부 지역은 충청북도 청주군에 속해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예컨대 덕평면이라는 청주군의 월경지 일부가 전의군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경계와는 다른, 시대마다 변화해 온 행정구역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연기현과 전의현의 특산물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연기현은 여우가죽, 수달피, 삶쾡이(삵) 가죽, 전의현은 족제비털, 잡깃(장식용 깃털류)을 올렸다는 기록입니다. 단순한 세금 관련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다뤘던 주민들의 삶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재밌는 기록이자 한 마을이 살아 숨 쉬던 풍경을 그려볼 수 있는 소중한 단서입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뿌리는 ‘연기’라는 이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마을 곳곳 오래된 가게들, 골목 어귀, 그리고 지금도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연기군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후 (2)편에서는 연기리에 남은 청사 부지를 직접 방문하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참고문헌] 간행물 -세종문화원. 2016. 조치원의 옛모습: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세종문화원.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 행정중심복합도시 + 연기군 남면: 남면 연기3리.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연기군지편찬위원회. 2008. 연기군지(상권). 연기군청 문화공보과. -연기문화원. 2011.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I : 금남면, 남면, 동면. 연기문화원. -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연기전의현 관아 조사. 연기문화원. -최석로. 1992.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상권 산하와 풍물. 서문당.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조치원읍지. 조치원읍지 편찬위원회. 인터넷 -북세종 통합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교리”. https://www.sejong.go.kr/shrUrl/pdw75kPJjrnW63EGfs03.do -심정보. 「연기군」.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http://aks.ai/GC07700234.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홈페이지, https://www.cihc.or.kr/kor. -한정수, 김재광. 「연기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10.
  • 연기군의 기억(2) : 옛 군청 터에서 마주한 사람들
    1편에서 연기군청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던 도중, 연기군청이 조치원읍으로 이전하기 전, 연기면 연기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마침 마을기록문화관으로 한 시민이 기록화에 대한 제보를 해주셨다.  연기리에 옛 군청 부지가 있고, 그곳에 있는 보호수들도 알아봐달라는 것. 기록을 따라가던 발걸음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을 좇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 연기리 옛 연기군청 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 연기리 옛 연기군청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연기리를 직접 찾았다. 터는 황량했다. 건물의 터는 알아볼 수 없었고, 그 자리에 고양이와 닭들이 어슬렁거리는 공간 한가운데, 오래된 두 그루의 보호수만이 시간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주변을 한참 둘러보아도 바로 앞 ‘금성주택’이라는 주거지가 눈에 들어올 뿐 어떤 건물이 있었다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 연기리 옛 연기군청 및 남면사무소 터 > (촬영 : 25-03-21)   < 연기리 옛 연기군청 터 앞 '금성주택' > (촬영 : 25-03-21) 이 곳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마을복지회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마을뿌리전시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기리의 역사와 생활자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전시관에서는 기대와 달리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 연기복지화관 마을뿌리전시관 입구 > (촬영 : 25-03-21)   < 연기복지화관 마을뿌리전시관 내부. 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 (촬영 : 25-03-21) 복지회관 안 경로당에 계시던 할머니들께 여쭤보았더니 대부분 이 터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나 ‘연기군청’이라는 이름보다는 ‘남면사무소’로 불렀다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건너편 게이트볼장에 가 경로회장님을 만나보길 권해주셨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연기1구 경로당 회장 하태영님.   < 연기1구 경로당 회장 하태영님 > (촬영 : 25-03-21) 하 회장님은 과거 이곳 면사무소를 철거할 때도 현장을 직접 보셨다고 했다. 당시 나온 자재들을 실어다가 종촌리에 새로 지은 면사무소에 그대로 사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 면사무소의 현관 기둥을 받치던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양조장을 운영하던 누군가 사갔고, 그걸 사간 사람이 연서우체국도 함께 사셨다는 것. 나는 연서우체국으로 향했다. 별정우체국이었기 때문에 사실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 연서우체국 전경 > (촬영 : 25-03-21) 우체국 직원에게 돌기둥 이야기를 꺼내자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돌아서려는 순간,  직원이 갑자기 “어?!”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혹시… 그 옆집에 있는 그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설마? 하면서도 옆집으로 향했다.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 > (촬영 : 25-03-21) 옆집 가게 현관 앞에 놓인 돌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우체국과 옆 가게 모두 한 국장님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 우체국 국장님과 통화로 관련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엔 단호하게 부정하셨다. “이건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거예요. 누가 그걸 사왔다는 거예요?” 하지만 증조할아버지 성함을 여쭤보자, 놀랍게도 하 회장님이 말한 이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쉽게도 1911년까지 연기리에 있던 연기군청이나 남면사무소의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어디에 있었던 기둥인지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헌들이 사라진 시점에 마을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따라 맞춘 퍼즐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었다. 기록은 그렇게 한 조각씩 이어졌다. 기록을 모은다는 일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세종의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남겨진 흔적, 말해주는 사람, 그리고 걷는 발걸음 사이에서 그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다. [참고문헌] 간행물 -세종문화원. 2016. 조치원의 옛모습: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세종문화원.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2007.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 행정중심복합도시 + 연기군 남면: 남면 연기3리.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지원사업소. -연기군지편찬위원회. 2008. 연기군지(상권). 연기군청 문화공보과. -연기문화원. 2011. 연기군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 I : 금남면, 남면, 동면. 연기문화원. -연기문화원, 연기향토사연구소. 2011. 연기전의현 관아 조사. 연기문화원. -최석로. 1992.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상권 산하와 풍물. 서문당.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2. 조치원읍지. 조치원읍지 편찬위원회. 인터넷 -북세종 통합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교리”. https://www.sejong.go.kr/shrUrl/pdw75kPJjrnW63EGfs03.do -심정보. 「연기군」.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http://aks.ai/GC07700234.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홈페이지, https://www.cihc.or.kr/kor. -한정수, 김재광. 「연기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10.
  • 세종 마을기록
    주제 컬렉션
    • #마을문화자원
    • #마을의변화
    • #시민의삶
    • #마을공동체